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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각경
법성화 2016-02-08 17:53:12, 조회 : 1,413,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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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圓覺이란 다섯 글자가 [원각경]열두 장의 大義를 다 거두었고, 열두 장에 있는 모든 내용이 이 한 제목의 오묘한 뜻에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보배 거울을 대하는 듯하다. 증득된 법을 大覺이라 하고, 圓覺이라 하며, 妙覺이라 한다. 증득한 사람과 증득하는 지혜도 大覺이라 하고, 圓覺이라 하며, 妙覺이라 한다. 能證과 所證의 그 이름이 다 똑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極證의 경계는 人과 法을 다 잊고, 함께 잊는다는 그 자체도 空寂하다. 理와 智가 함께 원만하고, 함께 원만한 자체도 또한 사라지며, 함께 원만하면서도 함께 사라져 能과 所로써 나누어질 것이 없기 때문에 能證과 所證의 그 이름이 똑 같은 것이다.

증득된 법을 大覺이나 圓覺 또는 妙覺이라 하는 것은, 이는 마치 “허공은 大覺 가운데서 생겨난다”라고 하고, 또 “대다라니문(大陀羅尼門)이 있으니 그 이름을 圓覺한다”라고 또 “無上妙覺이 모든 시방세계에 두루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증득한 사람과 증득하는 지혜를 大覺이나 圓覺 또는 妙覺이라
하는것도, 이는 마치 大覺 세존이나 원각보살 또는 묘각보살의
표현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悟.修.證.化는 [원각경]의 大旨이며 많은 경전들의 宗旨가 된다. 그러나 많은 경전에서는 이것을 혹 本覺과 始覺으로 말하기도 하고, 혹 自覺과 他覺으로 말하기도 하나, 解行證化에서는 서로 그 뜻을 나타내도 그 내용이 미진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현상에 두루하고 이치가 원만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상세하게 다 갖추고 있는 경이 있다면 그 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이외에 오직 이 [원각경]뿐이다. [원각경]이 [화엄경]과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그 내용이 간결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大方廣圓覺은 곧 [화엄경]의 大方廣佛이다. 佛을 覺이라 이름할 때는 自他의 覺이 원만한 것을 의미하니, 이른바 覺이 원만하다는 것은 곧 [원각경]에서 말하는 圓覺이다. 이것이 [화엄경]과 [원각경]의 내용이 크게 같은 이유가 된다

悟.修.證.化 이 네 가지를 활짝 펼쳐서 법계를 장엄 하는 것이 화엄이다. 그러므로 “다라니 무진보배로써 법계를 장엄하니 부처님 세계라고 말한다. 무진(無盡)이라 말한다면 대소,
편원(偏圓), 돈점(頓漸), 了義와 不要義를 모두 남김없이 수렴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바다가 세상에 있는 물의 모든 흐름을 받아들여도 끝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화엄을 大敎라 부르는 것이며, 또한 圓이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수다라요의경(修多羅了義經)의 의미는 修多羅가운데 따로 了義를 취하여서 바로 그 근기에 해당하는 사람을 가르친다는 經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經을 了義라 하며, 또한 頓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화엄경]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經은 가로와 세로로 짜이는 씨줄과 날줄의 의미를 갖고 있으니, 종횡(縱橫)으로 거침없이 설명해 나간다는 뜻이다. 위에서 말하는 오묘한 종지를 종횡으로 설명하여 부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여, 名句文으로써 이치를 짜 맞추어 법을 만들어서, 영원히 수행자의 본보기로 삼아 그들을 깨우쳐 피안에 도달하게 하니, 이것이 이른바 經의 의미이다. 말하자면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은 이것을 그 의미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게송으로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미묘한 법 설명하기 어렵다 하나

눈을 뜨면 분명히 눈앞에 있네

경의 이름 바로 알면 글자가 없어

어찌 문자 해석하며 경을 보겠나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는 대중의 수는 천여명이 넘었고,
법회에 수많은 보살이 있었으니 그 수가 십만이나 되었다.
그런데 아난이 무슨 인연으로 홀로 “내가 들었다”고 하고,
또 그 말이 모든 경의 서두에 놓여져 오랜 세월을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아난은 십대제자 가운데 多聞을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난이
현명하게 된 것은 일찍이 공덕의 근본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며, 그 총명한 깨딸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금생에 그는 다시 전생의 원력을 이어서 항상 부처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설하신 법의 내용을 한 구절 한 게송이라도 다른 곳에 기록 해 놓은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가슴속에 모든 것을 간직하여 잊지 않았다.

부처님이 열반 하실때에 그가 단지 “경의 첫머리에 놓아야 할
구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은 “如是”등의 말을 놓도록 하였다. 부처님이 열반 하신후 아난이 가섭의 도움으로 먼저 누진통을 얻고 나서야 결집이 시작 되었으며, 처음 법좌에 올라갈 때 대중이 의심을 세 가지 일으키자, “如是”라는 한 번의 소리로 단숨에 모든 대중의 의심을 풀어 버렸다.
그러므로 “如是”등의 말은 부처님이 친히 부촉하신 바 아난을 일찍이 대중의 의심에서 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 한마디를 부처님이 사십구년 동안 설법하신 경의 첫머리에 두게 되고,
부처님의 법문이 있는 곳을 따라 오랜 세월을 전해 내려 온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칭송을 듣게 되어 그들 개개인으로 하여금 좋다라고 하게 하니, 어찌 이를 바르다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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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능스님/무소의 뿔처럼
오도행 [2016-02-10] : 원각경에 대하여 처음으로 접하게되어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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