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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불교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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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 스님’이라 불리는 도선사 주지 선묵 혜자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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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7 10:43:27, 조회 : 2,416,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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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뜬 무지개, 우연치고는 기묘한 인연입니다”선묵 혜자 스님이 2001년 서울 도선사 주지로 부임한 후 도선사 경내에서 맑은 날 무지개가 목격되어 화제다. 특히 무지개는 특별한 시기에 남다른 형상을 발해 신도들이 더욱 상서롭게 여긴다. 활발한 불사 마련으로도 칭송되는 선묵 혜자 스님은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올해 9월 도선사 주지로 재임됐다. ‘천생 스님’이라 존경받는 혜자 스님에게 저물어가는 2005년의 송사를 청했다.
꿈속에 나타난 청담 스님 때문에 봉안한 포대화상
"스님, 포대화상과 너무 닮으셨어요”라는 기자의 말에 도선사 주지 선묵 혜자(53) 스님은 미소만 건넨다. 수줍은 듯 아이처럼 웃는 스님은 영락없이 포대화상의 모습이다. 도선사의 명물로 손꼽히는 포대화상은 `배 부위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따라 웃으면 복이 생긴다는 석상. 포대화상을 통해 보시된 돈이 도선사에서 묵묵히 일하는 자원봉사자와 노 보살들을 위해 쓰여져 그 의미를 더한다.
포대화상은 바랑(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을 메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물건을 나눠주고 쓰레기를 주워 담았다는 당나라 스님. 불교에서는 행복을 나눠주고 고통과 불행을 담아 다니는 미륵보살의 화현으로 얘기한다.
도선사에 포대화상을 안치한 이가 선묵 혜자 스님이다. 포대화상을 세우기까지 사연도 많았다. 지금의 자리에 포대화상이 설 수 있었던 건 청담 스님(1902~1971) 때문이라고 한다. 청담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초석을 마련한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많은 불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선묵 혜자 스님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데, 선묵 혜자 스님이 청담 스님을 마지막으로 시봉(侍奉)했다.
"원래 포대화상을 도선사 입구 작은 연못(청담심지) 가운데 앉히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신도들이 배를 만질 수 없잖아요. 그래서 포대화상을 포기하고 대신 두 동자가 동전받는 석상을 안치했습니다. 그런 후 1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청담 스님이 제 꿈에 나타나셨어요. 스님이 생전에 쓰시던 육관장을 짚고 현 도선 사내 청담 스님 동상이 있는 자리에서 걸어오시더니 지금의 포대화상이 있는 자리에서 멈추시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더라구요. 의미 심장한 생각이 들어서 아침 예불을 드리고 그 자리에 가봤더니 너무나 지저분하더군요. 이 자리를 어떻게 할까, 화단을 만들까 하다 문득 전 해에 포기했던 포대화상이 생각났습니다.”
놀라운 건 포대화상 제막식이 있던 날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 2003년 음력 9월 1일 새벽, 대웅전 삼존불상에서 상서로운 푸른 빛이 목격됐다. 그 빛은 자리를 옮며 40분간 지속됐는데 새벽 기도를 올리던 신도 1백여 명이 함께 지켜봤다. 그때의 광경이 비디오로 촬영됐고, 공중파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어쩌다 일어난 우연한 사건으로만 남았을 터. 그날의 서광은 도선사 내 상서로운 기운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도선사 상공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지개가 목도된 것이다. 그건 비온 뒤 으레 뜨는 무지개가 아니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나타났고,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맞춰 출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맑은 날 무지개는 모두 네 차례 목격되었는데 특별한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상서롭게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특정한 날과 특정한 시간에 뜬 네 차례의 무지개
대웅전에 서광이 비친 지 꼭 1년 만에 첫 무지개가 떴다. 2004년 음력 9월 1일 7관세음기도 회향 날(기도 마지막 날)이었다.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으나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를 지내는중 선묵 혜자 스님이 "지난해 같은 날 저희들에게 보여주셨던 상서로운 빛을 오늘 저희에게 가망하여 주옵소서”라고 발원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뜬 것.
선묵 혜자 스님은 기도가 끝나면 신도 한 명 한 명에게 낙관을 찍어주는데,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무지개를 보며 신도들은 낙관이 끝날 때까지 무지개가 떠있는지 지켜보게 됐다고 한다. 무지개는 한 시간 조금 넘게 5백여 명의 신도들이 낙관을 다 받을 때까지 떠 있었고, 낙관을 마친 선묵 혜자 스님이 합장을 하자 서서히 사라졌다고 한다.
마침 그 광경이 비디오와 사진으로 찍혔는데, 나중에 사진을 살펴보니 특별한 형상이 드러나 있어 사람들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무지개 왼쪽 위에는 육관장을 짚은 청담 스님이 마음 심(心) 자 위에 올라서 있는 형상이, 오른쪽 위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상이 촬영된 것. 사진을 본 법장 스님(1941~2005·전 조계종 총무원 원장)도 "선묵 혜자 스님이 도선사 주지로서 원력을 세우고 신도들과 열심히 기도를 하니 이렇게 상서로운 서광이 비친다”며 덕담을 했다고 한다. 또 그로부터 70일 이후 불교계의 큰 행사날인 동지에 한 일(一) 자의 무지개가 떠서 2천여 명의 신도들이 지켜봤다. ‘一心’ 평소에 마음 수행을 강조했던 청담 스님의 뜻이 담긴 게 아닌가 하고 신도들은 해석한다.
올해도 두 번의 무지개가 목격됐다. 한 번은 경로 위안잔치 때. 선묵 혜자 스님은 도선사 주지가 되기 전 수락산 도안사에 있을 때부터 해마다 경로 위안잔치를 해오고 있는데 올해가 24번째였다. 경로 위안잔치에 대한 스님의 애착이 큰 만큼 무지개의 의미가 남다르다.
"도안사는 신도가 몇 십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사찰이에요. 20년 전쯤 사찰 밑에는 무허가 집들이 많았어요. 끼니를 거르는 노인분들이 많아 밥 한 끼씩 대접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워낙 작은 절이다 보니 돈이 없었는데 초파일을 쇤 다음 약간의 목돈이 들어올 때 특정한 날을 잡아 경로잔치를 했어요. 그러다 대학교수가 사업자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을 뉴스로 접했습니다. 불효가 막심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을 절감했죠. 그 후부터 효행심을 고취시키자는 취지에서 동네 추천을 받아 효행상도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람을 느끼는 일 중 하나입니다.”
또 한 번의 무지개는 법장 스님 영결식 때 떴다. 조계사 마당에 앉아 있던 선묵 혜자 스님은 그날 따라 이상하게 하늘을 쳐다보게 되더란다. 그러다 문득 법장 스님에게 첫 무지개 사진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생각이 났다고. ‘선을 행하면서 묵묵하게 정진한다’는 뜻의 ‘선묵’이라는 법호도 법장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
선묵 혜자 스님은 ‘아, 법장 스님 마지막 가시는 오늘 같은 날 무지개 한줌 떠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수시로 하늘을 쳐다봤는데 오전 10시 반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갑자기 옅은 구름이 밀려들었다. 보통 구름과 달라 보이는, 흔히 결혼식장에서 드라이아이스로 만드는 연기와 같은 구름이 해를 둘러싸더니 엷은 무지개가 섰고, 시간이 지나자 점점 선명해졌다고 한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한 스님에게 선묵 혜자 스님은 하늘을 보라 했고, 그것이 영결식 사회를 보던 미산 스님에게까지 전해졌던 것. "하늘에 무지개가 떴습니다”라는 사회 스님의 이야기에 영결식장에 모인 많은 이들이 하늘을 쳐다봤다. 그 광경은 때마침 방송 촬영을 나온 한 공중파 방송 카메라에 찍히게 되면서 밤 9시 뉴스에까지 나가게 됐다고. 그날 무지개는 세 차례에 걸쳐 나타나 상서로운 기운을 더했는데 오전 10시 반쯤 조계사 영결식장, 오후 2시쯤 도선사 상공, 오후 3시 반쯤 수덕사(법장 스님이 머물렀던 절)에서 목격됐다. 모두 선묵 혜자 스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듯들이다.
기복적으로 흐르면 혹세무민하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반응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사건이라고 여겨져서 많은 신도들은 상서롭게 여긴다. 선묵 혜자 스님 역시 도선사 신도들의 신심 깊은 기도로 7관세음보살이 일곱 색깔 무지개로 화현, 광명불심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보여주시는 게 아닌가 새긴다고.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자숙하며 차분하게 이 기이한 현상을 받아들이려 한다고도 했다. 혜자 스님이 도선사 주지로 부임한 후부터 무지개가 목격돼 사람들은 선묵 혜자 스님을 ‘무지개 스님’으로 부른다.
14세에 출가, 도선사와 깊은 인연
선묵 혜자 스님은 14세에 출가했다. 모두가 힘들게 살았던 보릿고개 시절 선묵 혜자 스님 역시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했던 스님은 한문공부를 하기 위해 도선사로 들어갔다. "친척 중 한 분이 도선사 총무 스님으로 계셨어요. 그분이 집에 들르실 때마다 어린 절 보고 ‘이 놈은 앞으로 중이 될 사람’이라며 어머니에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절로 보내라고 얘기하곤 하셨어요.”
도선사에 출가해 청담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고, 출가한 지 35년 만에 도선사 주지가 된 선묵 혜자 스님. 이래저래 도선사와는 인연이 깊다.
어려서 출가한 탓인지 선묵 혜자 스님은 절에 있는 동안 속세에 대한 미련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혈기왕성한 20대에는 사회에 대한 호기심도 없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피로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출가한 지 40년이 된 선묵 혜자 스님은 뒤돌아보면 청담 스님이 열반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큰 스승이자 정신적인 의지처였던 청담 스님은 속세로 말하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분이 돌아가시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공허함이 느껴지더라고.
청담 스님 열반 후 49제까지 정성스럽게 염불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았을 정도로 선묵 혜자 스님의 허전함은 깊어갔다. 이후 도선사를 떠나 여기저기서 선방 공부를 하다가 2001년 도선사 주지가 되면서 다시 도선사로 돌아왔다.
도선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선묵 혜자 스님은 크게 세 가지 원력을 세웠다. 그간 비공개였던 예산을 공개 예산으로 바꾸고, 청담 스님의 많은 제자들을 한데 모으는 문중 화합 사업을 실천했다. 또 유명한 기도 도량인 도선사를 포교와 문화 도량으로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활발한 불사 마련으로도 칭송되는 선묵 혜자 스님. 스님은 대웅전 앞을 가로막고 있던 요사채를 헐어 신도들의 기도 공간을 마련했다. 원래 요사채는 함부로 헐면 재앙이 올 수도 있다 하여 그동안 헐지 못했는데, 선묵 혜자 스님이 대웅전의 서광을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겨 자신감을 갖고 해체했다고 한다.
청담 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청담 기념관과 청담사상 연구소를 개원했고 그외 반야굴 조성, 참회원 정비, 마당 복개, 윤장대 봉안 등 다양한 불사를 매듭지었다. 지난해에는 캄보디아 남방 불교 체험에 나서 앙코르와트 유적 복원에 참여했다. 한국과 캄보디아 간의 불교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은 선묵 혜자 스님은 2004년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유네스코가 수여하는 은관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묵 혜자 스님은 올해 9월 도선사 주지로 재임됐다.
주지로서의 바쁜 일정과 다양한 불사에도 불구하고 선묵 혜자 스님은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8배를 올린다. 지방에 내려가더라도 도선사 석불을 향해 108배를 올리는 스님의 모습은 많은 신도들에게 귀감이 된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오직 부처님 법만 알고 묵묵히 정진한 선묵 혜자 스님은 중앙승가대 교수 미산 스님, 봉화 청량사 주지 지연 스님과 함께 불교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선묵 혜자 스님에게는 요란한 수식이 필요 없다. ‘천생 스님’으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올 한 해 가슴에 담았던 고통을 모두 저에게 주십시오. 부처의 은덕으로 밝은 날을 맞이하실 수 있게 돕겠습니다. 어떤 집착도 어떤 욕심도 물흐르듯 보내고 부처의 넓은 마음으로 내년 새 해를 맞이하십시오.”
합장하는 스님의 장삼 속에 맑은 날의 무지개가 숨어 있다.
레이디경향 2005.12.16 글 / 신현화 기자 사진 / 손경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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