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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불교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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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8 22:46:05, 조회 : 2,262,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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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1923-5.jpg (240kb) 다운 :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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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스님(오른쪽)과 군인들이 동선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합장을 하고 있다.
정원 스님은 경기 용인읍 양지면 식금리 동선사에서 시자도 없이 홀로 기거해 오다가 지난 11일 벌목작업 중 법당 앞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그러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5일 후에야 입적 사실이 알려졌다.
평소 스님과 가까이 지냈던 권혁자씨는 “지난 12일 건강검진이 예약돼 있어 수차례 전화를 해도 안 받으셨다”며 “바쁘신 줄로 생각했는데, 그런 일을 당하셨다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권씨는 “스님은 군인들을 끔찍히 사랑하며 20년 넘게 군 포교에 애정을 기울였다”며 “스님의 법구(시신)가 일요일 아침 법회 참석차 나온 군인들에게 발견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맑은 바람 스미는 초여름 연못에/ 모든 시름 잊은 듯 초연하게 피는 모습/ 홀깃 보면 여민 듯이 다시보면 웃는 듯이/ 홀연히 풍겨오는 그윽한 임의 향기/ 아 아 연꽃이 지는구나/아 아 연꽃이 피는구나.”(1절)
‘홀로 피는 연꽃’은 고인이 된 작곡가 서창업이 정원 스님의 곱고 청아한 삶에 감동해 만든 불교 노래로, 명상음악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이 노래를 지을 무렵 서씨는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다.
20대 후반의 정원 스님은 당시만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서씨의 찬불가 창작 활동을 가상히 여겨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고, 서씨는 이러한 스님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찬불가로 풀어냈다고 한다.
작고 가냘프고 말수가 적은 스님은 한없이 자애로웠지만, 성정 자체는 엄하고 강직했다. 편안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곁에 시자라도 한 사람 두었을 법한데, 이조차 허용치 않은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는 엄격했음을 의미한다.
정원 스님은 연꽃처럼 고고한 삶을 산 것으로 주변에 인식돼 있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불사는 일절 삼갔다. 그저 시줏돈이 생기면 군인들과 청소년들에게 베풀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장학금으로 나눠 줬다고 한다. 스님은 20년이 넘도록 동선사 땅을 단 한 평도 늘리지 않았다. 법당도 검소하게 꾸며 70㎝ 크기의 작은 불상 하나밖에 없다. 동선사에서 유일하게 시설을 보완한 것은 연료비를 아끼지 위해 보일러를 새로 교체한 것 뿐이다.
스님은 2004년 말부터 몸이 아파 약을 먹었는데, 신도들이 병원에 한번 가보자고 해도 혹여 ‘큰 병’이면 신도들에게 부담될까 봐 뿌리치곤 했다. 정원 스님은 자신이 명의로 된 동선사도 행여 속가에서 손을 내밀까 봐 지난해 조계종단에 귀속시켰다. 스님의 바랑에는 목탁 하나가 전부였다.
정원 스님은 ‘군 포교의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용인에서 군 포교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인생 역정 가운데 20여년은 군과의 깊은 인연 고리가 있다.
충남 서산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정원 스님은 14세에 서울 우이동 보문사로 출가한다. 스님은 보문사에서 야학으로 중·고교를 마치 해인사 강원을 나와 비구계를 받았으며,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수학했다. 스님은 80년대 초 30세가 넘어 용인 서학사에 주지로 부임해 4년간의 주지 소임을 마치고 떠나야 했지만, 숨은 사연이 많아 결국 용인 땅에 눌러앉는다.
스님은 오지마을인 양지면 식금리로 들어가 조그만 암자 하나 짓고 학생 포교를 이어나갔다. 이때 군부대가 들어와 암자가 철거된다. 스님은 군에서 받은 보상금으로 부대 울타리 옆에 약간의 임야와 밭을 사들이고 시멘트블록으로 단칸짜리 지금의 동선사를 지었다.
스님은 부대장을 설득해 일요일이면 군인들을 모아 법회를 열었다. 군인들은 부대보다 더 좋은 흰 쌀밥에 동선사 신도들의 사랑을 받으며 나날이 늘어갔다. 부대에 체육대회라도 있는 날이면 꼭 떡이라도 해다가 먹였다. 스님의 교화에 감명 받은 학생과 군인 중에는 훗날 승려가 된 사람도 여럿 있다. 유명한 비구니 성악가 정율 스님도 그가 지도한 학생이다.
동선사 신도회장 배건선(용인농협 조합장)씨는 “스님은 오직 공부만 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순수한 삶을 사셨다”며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동선사가 존재하는 한 군인법회와 학생법회는 끝까지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스님은 찬불가 ‘홀로 피는 연꽃’처럼 흙탕물 같은 험한 세파에서도 고고한 삶을 지켜냈다. 스님을 도와 군인들에게 밥을 해주었던 많은 자원봉사자, 스님의 영결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하나같이 스님의 맑고 순수한 삶을 기리며 애통해하고 있다.
2006년 1월 18일(수) 세계일보 정성수 기자 hulk@segy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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