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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6 21:58:50, 조회 : 1,242,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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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우리야 시대
인도의 마우리야 왕조는 기원전 4세기경 마가다국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성립한 왕조이다.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영국 식민지 이전의 그 어떤 왕조보다도 넓은 영토를 확보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우리야 왕조 성립의 직접적이며 강력한 원인은 세계 경영의 야망을 지닌 젊은 정복자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초, 알렉산더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입한다. 알렉산더의 인도 정복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인도에 남긴 영향은 지대했다. 우선 바로 직후에 마우리야 왕조라고 하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제국의 성립과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 미술 기법의 발달이다.
①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이 남긴 영향
알렉산더가 인도를 공략한 것은 기원전 327년에서 324년까지 약 3년이다. 그는 탁실라를 정복한 뒤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국가들을 병합해 갔다. 도중에 뽀로스Poros라는 왕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결국 그도 알렉산더에게 항복하고 만다. 거칠 것 없이 진군하던 알렉산더가 인도 공략을 단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휘하 군대의 폭동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군대는 이미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오랜 정복 전쟁에 지쳐 있었으며, 낯선 인도 환경에서의 전쟁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코끼리 군대와 밀림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인도군 역시 공포심을 자아내게 했다.
알렉산더는 베아스Beas에서 퇴각을 결정하고 군대를 돌렸다. 멀고도 먼 정복 전쟁을 일단락하고 고국 마케도니아로 돌아가고자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페르시아의 바빌론에서 기원전 323년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 후 제국은 분열되고 만다. 하지만 인도에는 알렉산더가 남겨 놓은 알렉산드리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자적인 왕조를 세워 인도 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박트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 그리고 서북 인도 지역의 알렉산드리아를 들 수 있다.
알렉산더의 인도 침입은 세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인도에 거대 통일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와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도와 유럽 간의 교역 통로가 생겨난 점이다. 지역과 지역 간의 교통로가 생겨남으로써 세계적인 교역이 가능해졌다. 셋째는 그리스 문화와 인도 문화가 결합되는 문화적 토양이 생겨난 점이다.
② 마우리야 제국의 탄생
마우리야는 짠드라굽타 Candragupta(B.C. 324~B.C. 300)가 마가다국의 마지막 왕조인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다. 짠드라굽타에 대한 기록은 『빨리 연대기』를 포함해서 뿌라나Purana 문헌 등에서 확인되지만, 전승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짠드라굽타의 출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마우리야족의 끄샤뜨리야 계급에 속한다는 설, 둘째는 난다 왕가의 한 후손과 비천한 시골 처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또한 그리스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안드라꼬뚜스 Andrakott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알렉산더와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알렉산더의 힘을 빌려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를 무례하게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고는 겨우 도망쳐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짠드라굽타는 은신하던 중에 『실리론Arthasastra』의 저자로 유명한 까우띨리야 Kautiliya를 만난다. 까우띨리야는 짜나꺄Canakya 라고도 불린 탁실라 출신의 브라만이었다. 짠드라굽타는 그의 도움으로 왕조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왕조를 건설하면서 서북인도를 정복했고, 그 다음에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면서 북인도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서북쪽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전쟁을 통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손에 넣고 결혼 동맹을 맺는다. 이로써 짠드라굽타는 통일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성공한다.
자이나 문헌에 따르면, 짠드라굽타는 만년에 아들인 빈두사라 Bindusara(B.C. 293~B.C. 273)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이나교의 승려로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③ 아소카의 불교 귀의
짠드라굽타가 개창한 마우리야 왕조는 그의 아들 빈두사라로 왕위가 이어진다. 빈두사라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교류하면서 헬레니즘 문화와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한편, 영토를 인도 중남부 지역까지 확대했다. 이로써 인도의 대륙에 거대 왕조가 세워졌다.
빈두사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황제인 아소카이다. 마우리야 왕조의 극성기를 이룬 인물이자, 불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인물이다. 불교에 귀의, 세계화에 공헌한 이유로 그는 전설상의 이상적 통치자인 전륜성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소카는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 현재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전쟁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고 전한다. 전쟁의 참담함을 뼈저리게 느낀 아소카는 무력에 의한 정복 활동 중지를 선언하고 이를 계기로 불교에 귀의한다.
이로써 마우리야 왕조는 역대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이 되었다. 인도 내에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 제국을 완성한 아소카는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존중했다. 그의 통치 이념은 어디까지나 다르마* dharma에 근거를 두었다.
• 즉위 8년 칼링가를 정복하고 이후 다르마를 배우고, 다르마를 사랑하며, 다르마로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 헌신했다. 이것은 칼링가 정복에 대한 나의 회한이다. (중략) 다르마에 의한 승리 Dharma-vijaya야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승리는 변경 지역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졌다. (중략) 다르마에 의한 승리는 나에게 깊은 만족을 주었다.
아소카는 비록 무력으로 인도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었지만, 이후 통치는 다르마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였다. 이것이 그를 전륜성왕에 비유하게 된 이유이다.
④ 아소카의 전도사 파견
아소카는 칼링가 전쟁 후 불교에 귀의, 우바새가 되어 불교 승단의 외호자가 된다. 그의 불교에 대한 열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불교 건축 물의 건립, 둘째는 부처님과 관련된 성지 순례, 셋째는 가족들의 출가이다.
『아육왕전』에 따르면, 아소카는 우빠굽타와 함께 부처님과 관련된 성지를 순례하고, 모든 장소에 탑을 건립했다. 그 후에는 위대한 제자들인 사리뿟따, 목갈라나, 까싸빠, 박꿀라, 아난다 등의 사리탑을 순례 · 예배했다고 전한다.
스리랑카 전승에 따르면, 아소카는 즉위 17년 혹은 18년에 빠딸리뿟따에서 제3차 결집의 개최를 후원했다. 목갈리뿟따띳싸Moccaliputta-Tissa 장로가 주재한 이 결집은 9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후 여러 나라에 전도사단을 파견했다. 이 전도사 파견으로 불교는 인도를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전도사가 파견된 지역은 모두 9개 지역이다. 당시 전도사의 파견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방(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 남쪽으로는 스리랑카에 이른다. 아소카의 마애 법칙Rock Edicts 기록에 따르면 전도사는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 키레네의 마가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고나타스, 에피루스의 알렉산더에게도 파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우리야 왕조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거의 모든 지역에 전도사를 파견한 셈이다. 이중에서 불교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은 불교의 비옥한 토양이 된 스리랑카와 간다라 지방이다. 특히 스리랑카는 목갈리뿟따띳싸의 제자이자 아소카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친딸 상가밋따sanghamitta가 전도사로 파견되어 남방 상좌부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전한다.
나 없어라 - 범능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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