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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2 23:21:41, 조회 : 1,221,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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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불교의 쇠퇴
쿠샨 제국은 카니쉬카 왕 이후 급속한 쇠퇴를 맞이한다. 이후 힌두교 가운데 쉬바 종교를 믿었던 바수데와 왕 시기에 잠시 국력을 회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에게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의 서쪽 지역을 빼앗기고 펀자브를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에서 4세기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쿠샨 제국 이후 인도에 군림한 최강자는 바로 굽타 왕조였다. 320년경 북인도 지역에서 마가다 왕국의 명맥을 잇고 있었던 작은 왕국에 짠드라굽타 1세가 등장하여 북인도 지역을 거의 통합하여 굽타 왕조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다. 인도 북부를 거의 통합한 굽타 왕조는 사무드라굽타 시대에 서북부와 중부, 동부 지역을 통합하여 제국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후 짠드라굽타 2세 때에 아라비아 해에 인접한 서부 지역까지 병합함으로써 굽타 제국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굽타 왕조 시대는 브라만교가 자기비판을 거쳐 새롭게 힌두교로 변모하여 인도의 중심 종교와 사상으로 재등장한 시기였다. 동시에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왕권 강화 논리를 배경으로 등장한 힌두교에 밀려 쇠퇴의 길로 들어선 신호탄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굽타 왕조 이후 인도는 8세기 초부터 간헐적인 이슬람의 침입을 받았고, 11세기경이 되면 본격적인 인도 공략이 시작되어 결국 이슬람 제국으로 변하게 된다. 불교는 본격적인 이슬람의 침략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데 인도에서 대략 12세기 초에 자취를 감춘다. 이슬람의 무자비한 살상과 파괴로 불교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교 소멸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슬람의 공격은 불교만이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불교만 사라진 것은 불교가 인도 사회에서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에게서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이슬람의 무자비한 공격은 불교가 소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① 굽타 제국과 힌두교
중국 법현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굽타 시대에는 불교도 나름대로 널리 신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벵골 및 비하르, 옷타르프라데쉬 같은 지역에서는 불교 세력이 가장 강했다.
아상가, 와수반두, 구마라집 Kumarajiva(쿠마라지와), 디그나가 등이 활약한 시기도 바로 굽타 시대였으며, 아잔타와 엘로라의 불교 석굴 사원과 수많은 불탑 및 사원들도 바로 이 시기에 활발하게 건립된다. 사무드라굽타는 힌두교도였지만, 와수반두 같은 위대한 불교 학승을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으며, 또한 날란다Nalanda 불교대학도 왕들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계속 성장했다.
한편 굽타 제국 시기에 브라만교는 오늘날의 힌두교 (힌두이즘) 형태로 바뀌게 된다. 굽타 제국 시기에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탈바꿈하여 영향력을 발휘한 데에는 왕권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즉 굽타 제국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는 만민평등의 관점에서 카스트제도를 부정한 불교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브라만교 전통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비록 굽타의 통치자들이 불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결국 불교가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된다.
힌두교의 등장은 또한 카스트제도의 확고한 정립을 초래했다. 이 시대의 카스트제도는 신분에 의한 구별보다는 직업에 의한 구별로 변해 간다. 이유는 바로 다양한 이민족의 유입 때문이다. 이 시대 이민족으로는 샤카 · 쿠샨 · 파르티안 · 흉노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연스럽게 힌두화되면서 인도 사회의 신분 및 경제 부문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들 가운데 무사들은 끄샤뜨리야 계급으로, 나머지는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에 따라 인도 사회의 카스트제도에 흡수되었다. 전쟁 포로나 빚진 자들은 노예나 찬달라 Chandala가 되었고, 수드라를 제외한 다른 상위의 세 계급 간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서로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다.
② 밀교의 등장
불교가 인도 사회에서 보편적 종교로서 인식된 것은 교리의 보편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브라만 · 반힌두교의 대표적 성격으로 규정되는 종교 간 역학적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유신론에 입각한 사상과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카스트제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브라만교 · 힌두교와 대척점에 있는 불교는 대표적인 무신론적 종교이자 카스트제도를 비판하며 인간의 평등을 설파하는 종교로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의 흉기와 더불어 유신론적 · 구원론적 측면이 보완되고, 대승불교 후기에 이르러서는 힌두교의 주술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흡수, 불교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힌두교의 불교화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힌두교의 여러 요소들을 수용하면서 이들을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인 공, 반야, 방편, 자비, 여래장사상 등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불교의 힌두화라고도 할 수 있다.
밀교는 세 단계의 전개 과정을 갖는데, 먼저 6세기까지를 초기 밀교라고 한다. 이 시기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대승불교에 밀교의 의례가 침투한 시기이다. 그리고 7세기까지를 중기 밀교로 구분한다. 이 시기는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교리를 받아들여 사상과 실천 체계를 정비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 세기 이후를 후기 밀교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힌두교의 샥띠Sakti 性力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밀교가 가장 흥성한 시기는 빨라 왕조Pala(730~1197년경) 때이다. 굽타 왕조의 몰락 이후, 북인도 일대는 혼란에 빠졌는데 뒤를 이어 8세기 중엽 지금의 비하르 지방을 중심으로 등장한 대표적 왕조가 빨라 왕조이다. 빨라 왕조는 제3대인 데와빨라Devapala (821~861) 때 현재 남인도의 까르나따까, 케랄라, 따밀나두 주와 북서인도의 라자스탄 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한다. 빨라 왕조는 불교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왕조의 문을 연 고빨라 Gopala(756~781) 왕 때는 마가다에 오단따뿌리 Odantapuri 사원)을, 다르마빨라Dharmapala(781 ~ 821) 왕 때는 비끄라마실라 Vikramasila 사원을 세워 불교진흥에 힘썼다. 특히 비끄라마쉴라 사원은 인도불교 최후의 거점이었으며, 티베트에 인도불교를 전하여 티베트불교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빨라 왕조 때의 유명한 논사로는 자립논증파이자 『섭진실론Tatttvasamgraha』을 지은 샨따락쉬따santaraksita )와 까말라쉴라Kamalasila, 그리고 티베트 라마Lama교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되는 빠드마삼바바Padmasambhava)와 귀류논증파에 속하는 아띠샤atisa 등이 있었다.
밀교의 대표적 특징으로는 우선 ‘다라니’, ‘만트라’, 혹은 ‘명주’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일종의 주문인데, 불교 내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은 상당히 역사가 오래된 일이다. 예를 들어 상좌부의 일파인 법장부에서는 삼장 외에 주문들을 따로 집성한 주장呪藏을 첨가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불상을 제작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대승불교는 민중들의 종교적 열망에 부응하여 발생 초기부터 주술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불교화하는 과정들이 있었다.
그러나 밀교의 발달은 결국 힌두교와 불교의 차별성을 제거해 버린 측면도 강했다. 힌두교라는 종교에 맞서는 유일한 종교로서의 불교라는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많은 대중들이 불교를 떠나 힌두교도가 되거나, 대안으로 이슬람을 선택하게 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하지만 밀교의 성립과 발달은 인도불교를 보다 풍부하게 하였으며, 여러 나라에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
③ 이슬람의 도래
이슬람 세력이 인도로 들어온 것은 711년 무함마드 이븐 콰심Muhammad Ibn Qasim이 신드Sind의 왕 다하르를 물리치면서부터이다. 이후 곧 이슬람 세력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이 차지하는 대부분의 지역까지 확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인도 아대륙을 공략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븐 콰심 이후 거의 3세기 동안 이슬람 세력은 인도의 북서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2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구르 지역에서 터키계의 구르 왕조가 일어나 가즈니 왕조를 물리치고 인도 내륙으로 진출하게 된다. 구르 왕조의 아이박 Aybak은 델리를 중심으로 인도에 최초의 독자적인 이슬람 왕국인 델리 왕조를 건립한다. 하지만 터키계가 세운 델리 왕조는 비터키계에 대한 차별 정책과 술탄의 계승을 둘러싼 끊임없는 내분으로 할지 왕조, 투글룩 왕조 등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다가 1398년 티무르의 몽고군 침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물탄과 편자브를 중심으로 하는 사이드 왕조를 거쳐 로디 왕조가 나타남으로써 터키계에서 아프가니스탄계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한다. 이후 15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몽골인의 후손 바부르에 의해 무굴 제국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한편 불교가 인도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12세기의 일이다. 정확히 1203년에 델리 왕조의 아이박이 비끄라마쉴라와 날란다 사원을 소멸시키면서 실질적으로 인도불교는 종언을 고한다. 아이박은 힌두교와 불교 사원 등의 종교 시설을 약탈하고 철저하게 파괴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1203년을 기점으로 불교가 인도에서 완전하게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이후 대략 일이백 년 동안 소규모이긴 하지만 불교도가 존재했다고 한다. 비록 불교가 소규모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갖지 못하는 한 소멸과 다름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소멸된 불교는 티베트와 중국을 거쳐 동북아시아로,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을 거쳐 서남아시아로 널리 퍼짐으로써 세계종교로 발돋움했다. 이는 힌두교와 자이나교가 인도에서 살아남았으나 세계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인도에서 다시 불교가 부흥의 기치를 들고 등장한 것은 1891년 스리랑카 출신의 다르마빨라 스님이 마하보디협회를 창립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56년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암베드까르 박사로 시작된 집단 개종 운동을 계기로 인도에서 불교는 새롭게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인도 사회에서 다시금 반 힌두교의 대표 종교로 발돋움하고 있다.
향심 - 정율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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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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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광 거사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세계불교사 여덟번째 내용은 내일(목요일) 아침방송에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오늘도 부처님 법 안에서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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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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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광 거사님, 올려주신 세계불교사를 오늘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공부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내일(금요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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