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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0 22:00:00, 조회 : 1,153,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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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식민 지배 시기와 불교 말살 정책
스리랑카는 포르투갈(1505~1658), 네덜란드(1658~1796), 영국(1796~1948)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오랫동안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하에서 테라바다불교는 크게 박해를 받는다. 가톨릭의 포르투갈과 개신교의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외세의 불교 말살 정책은 승단과 재가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면서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불교 교육을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포르투갈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네덜란드는 관직과 농토 소유권 법적 제한, 교회를 통한 공식 문서 접수 단일화, 불교 사원의 파괴와 승려 살해, 사원 소유의 토지와 재산 몰수 등으로 개종을 강요하는 무력적인 선교를 지속하면서 불교를 탄압했다. 영국은 교회에서 행한 결혼만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조건이라 한정하고 불교식으로 태어난 아기는 법적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탄압을 가했다. 또한 정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학교 설립이 가능하게 하여 기독교 학교에 비해 불교 학교는 극히 적어졌고, 최초의 불교 패엽경 삼장三藏을 폐기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출가와 재가의 불교도는 호법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불교를 지켜 냈다. 이 기간 동안 대중성이 높은 독송용의 호주護呪 경전이 많이 나와 불교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에 깊게 뿌리내렸다. 부처님의 치아 사리와 보리수 축제 기간에는 캄보디아와 미얀마 등에서 고승들이 파견되어 쇠락해 가던 스리랑카 불교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⑤ 근대 불교 부흥운동
영국이 통치하던 1873년, 구나난다. Gunananda를 대표로 하는 승려들이 불교 비판을 일삼던 선교사들과 일주일간 벌인 종교 논쟁이 ‘빠나두라의 논쟁 Panadura vadaya’ 이다. 이 논쟁은 대표적인 불교 저항운동의 시작으로 불교 측이 크게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일주일 동안 목사 · 전도사와 승려 간에 벌어진 이 유명한 논쟁은 영자신문인 『실론타임즈The Celyon Times』를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는데, 불교 측의 승려들이 훨씬 치밀한 논박과 과학적 견해를 보이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이 논쟁을 통해 스리랑카인들은 불교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서구의 오랜 식민통치로 불교도임을 자처한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로 스리랑카의 문화적 정통성이 상실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불교 부흥운동은 다르마빨라 A. Dharmapala(1864~1933)에 의해 본격화된다. 다르마빨라는 1891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대각회大覺會 The Mahabodhi society 를 설치하고,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인도의 불교 유적을 발굴하고 보호하는 운동을 시작한다. 1898년에는 콜롬보 근처에 학교를 건립하고 교과과정에 명상 · 예배 · 비교종교학 등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다. 다르마빨라가 시작한 개혁의 바람은 승려를 교육하는 학교인 승원僧院 Pirivena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1873년 근대적 교육 방식을 적용한 불교 승가대학인 비디요다야 승원 vidyodaya Pirivena 이 세워지고, 1875년에는 비디야랑까라 승원 Vidyalamkara Pirivena도 설립되었다. 이 두 승원은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를 수용하여 교육했으며 독립 이후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59년 정식 대학으로 승격된 후 1966년 명칭을 바꿔 현재 켈라니아Kelaniya 대학과 스리 자야와르데네뿌라 Sri Jayawardenepura 대학으로 지속되고 있다.
또한 다르마빨라는 유럽 근대 문명의 해악이 자국의 문화적 유산을 파괴한다고 판단하고 스리랑카인들에게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존중과 부흥을 호소했다. 동시에 정치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킨 이후 불교 부흥운동을 반영 독립운동과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전개하였다. 1890년에는 미국 신지학회의 올코트 대령이 스리랑카에 와서 그를 후원하며 다르마빨라의 부흥운동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대각회는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새로운 사원의 건립, 유적의 관리 보존, 순례자를 위한 숙박 시설 설치, 연구소 · 박물관 · 의료시설 등의 신설, 인도 및 세계 각지에 지부 설치 등의 노력을 현재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특히 1851년에 인도에서 발굴하여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에 옮겨 두었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유골 반환운동을 성공시켜, 1952년 세계불교를 위한 세계불교도회의가 창설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1948년 스리랑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테라바다불교를 국교로 선포했고, 부흥운동을 통해 불교 사회를 유지하고 대외에 불교 국가임을 인식시켰다.
⑥ 현대 스리랑카불교
1950년 5월 대학 교수였던 말라라세케라 G. P. Malalasekera의 요청으로 세계불교도연맹 WFB(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이 결성되어 콜롬보에서 제1회 세계 불교도회의가 개최된 후 현재까지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독립 초기 사회주의 정치의 기조 아래 불교청년회, 공무원불교도단체 등을 중심으로 세속적인 불교 사회의 조직화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보시와 선정 등의 신행활동이 강조되고 권장되었다. 승가는 각 종파별로 독자적인 승려 교육을 위한 학원을 증설 하고, 대학과 승원 및 도서관을 세웠으며 저술활동을 통해 문서 포교를 전개했다.
1955~1956년까지 불기 2,500주년 붓다 자얀띠Buddha Jayanti 望年 행사가 실시된다.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하여 세계적 표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한 붓다 자얀띠와 관련된 모든 사업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불교를 국교로 삼은 스리랑카 정부는 싱할라어를 국어로 정하면서 스리랑카 불자들을 위하여 빨리 삼장의 싱할라어 번역을 시작하고 불교대백과사전을 편찬한다. 더불어 매주 불자들이 사원에 가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일요불교학교Sunday Dhamma school를 개설했고, 위빠사나vipassana 부흥운동을 통해 다양한 명상 센터들이 도시 근교에 세워졌다. 불교학교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있으며 스리랑카 행정부인 불교부에서 만든 교재로 공부한다. 참석 인원이 사원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매일 아침 불살생계不殺生戒 등 오계를 암송하고, 모든 학교에서는 『자비경慈悲經 metta sutta』을 암송하며 자애 명상을 한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스리랑카인들은 중요한 행사를 반드시 사원과 협의하여 함께 치른다.
욕불예찬(浴佛禮讚) - 비뮤티(vimut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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