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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4 06:07:13, 조회 : 1,083,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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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진 시대
서진 말에 이르러 자연재해와 역병으로 기근이 극심해져 농민들은 수탈을 견디지 못해 유랑하게 되었다. 한편 서진 멸망의 계기가 된 황족 간의 정권다툼인 팔왕八王의 난이 격화되면서 제왕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민족 군사력을 끌어들였다. 오랫동안 한인 왕조의 지배를 받던 남흉노가 이를 계기로 자립하고는 영가의 난을 일으켜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했다. 황제 회제(재위 307~311)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민제(재위 313~316)도 살해당했다. 317 년 승상 사마예가 제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원제(재위 317~322)로, 국호를 동진東晋이라 하고 수도를 건강建康(현재의 남경)에 두었다.
이름을 날리던 지식인들이 승려와 교제하여 불전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은 동진(317~418) 시대부터였다. 불교는 일찍이 후한 시대에 전해졌지만 사상적으로 중국의 사대부에게 영향을 준 것은 이 시대였다.
습착치(382 ~ 462)는 동진 명제(재위 322~325)가 불교를 수용하자 현철 · 군자가 불교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했다. 사대부에게 신선한 인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중국의 전통사상에는 없는 윤회 · 응보사상 때문이었다. 도교는 형체와 정신을 연마해 영원한 삶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단지 현재의 삶을 무한히 연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죽음이 만인에게 찾아오는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양생설을 주장한 혜강(223 ~ 262)과 연단술가로 『포박자』를 저술한 갈 홍(282~343) 등이 있다 하더라도 신선의 실재를 증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국 사람들에게 윤회 · 응보설은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동진 사대부가 불교의 윤회 · 응보설을 수용하는 데 취했던 방법은 불전 내용을 중국의 경적, 특히 노장의 책과 대조하는 것이었다. 동진 초기에 노장사상을 매개로 불전을 해석하는 이른바 격의불교의 풍조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진 말이 되면 격의불교에서 탈피하려는 경향이 보였고, 도안(314~385)과 그의 제자인 혜원慧遠(334~416) 이 중국불교의 초석을 다진다.
① 강남 귀족 사회의 불교
서진 시대에 불과 180여 곳에 불과하던 사찰이 동진 시대에 접어들면 1,768곳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승려도 3,700여 명에서 2만 4,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이처럼 증가한 승려들을 통괄하기 위해 불교 교단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승니가 증가하자 이들을 통제하는 승관僧官도 설치되었다. 강북에서는 구마라집의 제자 승천이 열중에, 법흠과 혜빈이 승록에 임용된 것이 시초다. 동진 초기 불교는 수도 건강을 중심으로 번성했는데, 서역 쿠차 출신의 백시리밀다라가 커다란 영향을 끼 쳤다. 그는 처음에 낙양으로 들어왔다 전란을 피해 오나라 건초사로 옮겼다. 승상 왕도(276~339)의 존경을 받으며 귀족 사회의 인사들과 교류를 갖고 그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끼쳤다. 그는 『대공작왕신주경』 · 『공작왕잡신주』 등의 주술 경전을 번역하여 처음으로 건강에 밀교를 전파했다. 또한 범패에 뛰어나 범패의 유행에 공헌했다.
강남의 청담이나 현학적인 귀족 불교의 발전에는 축도잠(286~374)과 지둔이 크게 공헌했다. 축도잠은 화북의 명족 출신으로 영가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원제 · 명제, 그리고 승상 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애제(재위 362~365)의 청을 수락하고 『방광반야경』을 강설하기도 했고, 청담계의 명사 유담과도 친교를 맺었다.
한편 노장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청담에도 뛰어났던 지둔은 당대의 명사인 사안(320~385) · 왕희지(303~361)와 교유했다. 수도 건강 동안사에서 『도행반야경』을 강설했고, 저서에는 『즉색유현론』 · 『성불변지론』등이 있다. 『아미타불상찬』은 혜원보다 앞선 정토교 관련 저술로서 주목할 만한 불전이다.
지둔이 강남 귀족 사회에 불교를 선포했다면, 도안은 화북 지역에서 계율을 제정하고 경록을 창설하여 불교 교단의 기초를 놓았다. 그 문하에서 배출된 이가 동진 불교의 지도자 강서성 여산의 혜원이다. 그는 유가의 고전 및 노장사상도 습득하였다. 도안이 “불교가 동진에 전파된 것은 혜원 때문이다.”라고 경탄할 정도였다. 혜원은 스승의 『반야경』 강의를 들은 후 출가했고, 동진 애제 말에 전란을 피해 여산의 동림사로 들어갔다. 30여 년간 산을 떠나지 않고 수도에 전념하는 동시에 승속의 교화에 힘썼다. 저서에 『법성론』 · 『적삼보론』 등이 있다. 혜원은 장안에 온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이 전래된 대승 불교에 관해 질의를 했다. 특히 법신의 문제와 대승과 소승과의 차이점 등을 주로 질문했는데, 당시 혜원과 구마라집의 문답을 모은 것이 『대승대의장』이다.
장안에 전해진 새로운 불교에 촉발된 혜원과 그의 문하는 구마라집의 신역경론, 특히 『대지도론』을 연구하여 『대지도론초』를 저술했다. 402년에 123명의 문도와 함께 지루가참의 『반주삼매경』에 의거하여 염불삼매를 실천하는 서약을 했다. 반주삼매를 얻는 방법으로 아미타불에 전념하여 현불한다고 하는 선관의 방법을 수련하고 있던 사람들은 내세의 정토왕생을 위해 염불자가 되었다. 이에 혜원을 연종의 조사로 떠받드는 여산의 백련사가 탄생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 정토교의 개조로 추앙받았고, 백련사는 당나라 이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보살이 가는 길 - 山空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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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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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광 거사님, 올려주신 세계불교사는 내일(토요일) 아침방송에서 공부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코로나19에 각별히 유의하시어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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