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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19:06:03, 조회 : 1,026,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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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自懷中解垢衣(단자회구해중의)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서 때 묻은 옷을 씻어 버릴지언정
불교공부란 무엇인가? 불교를 배워 성불을 하고, 견성을 하고, 해탈을 하고,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가 스님은 이에 대해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 있는 때 묻은 옷을 벗어던지는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垢衣(구의)' 즉 때 묻은 옷, 때가 꼬질꼬질한 더러운 옷이라고 한 것은 무명이나 번뇌를 비유한 말입니다. 그렇다고 옷에 낀 때처럼 무명이니 번뇌니 하는 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이런 비유로 표현한 것이지,
무명이나 번뇌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옷에 낀 때란 미망과 착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미망과 착각을 무명이라 하고 번뇌라 합니다. 번뇌가 흙처럼 덩어리져 있거나 무명이 오랜 시간에 걸쳐 닦아 낼 거울의 때처럼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왜곡하는 착각, 허망한 그림자의 장단을 논하는 미망, 그런 착각과 미망을 바탕으로 욕심내고 화내고 다투고 번민하는 한바탕 까닭 없는 소란, 그것이 무명이고 번뇌입니다.
비유컨대 수억만 년 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동굴이 있다고 칩시다. 누구도 들어간 적이 없던 그 동굴은 수억만 년 세월 동안 어두웠습니다. 하지만 한 자루 촛불을 밝히는 순간 그 어둠은 사라집니다. 수억만 년 동안 어두웠다고 해서 그 어둠이 천천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웠던 세월에 비례하여 밝아지는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왜 그런가? 어둠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명이니 번뇌니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고 닦고 손질해서 하나하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조 스님과 신수 스님이 남종과 북종으로 법맥을 달리하게 된 것도 결국 이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수대사는 "때때로 갈고 닦아서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명과 번뇌를 구리 거울에 낀 때처럼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즉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육조대사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끼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무명이고 뭐고 실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가 스님은 육조대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절도 육조 스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때 묻은 옷에다 비유했다고 해서 번뇌나 무명을 실재하는 것처럼 떠올리는 건 큰 착각입니다. 되짚어 말하자면 바로 그런 착각이 번뇌라면 번뇌고 무명이라면 무명입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만 없으면 그대로 깨달음입니다
수증향외과정진
誰能向外誇精進가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자신의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불교 공부를 한다는 건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옷을 벗어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불교 공부를 한다는 건 더러워진 옷을 열심히 빨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더러운 자기 옷 남 보기 부끄러워 자기가 빠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은 남들에게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정진했는가는 굳이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아도 저절로 압니다. 예를 들어서 봄이 오면 꽃이 핍니다. 꽃이 피었다면 이미 봄은 온 것입니다. 굳이 “봄이다, 봄이다”라고 동네방네 소리치지 않아도 이미 봄은 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언 땅을 녹이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라고 봄이 자랑하는 것 봤습니까?
자기 할 일 잘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다 압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을 잘 다스리고, 잘 관리하고, 살림을 잘 하면, 자신의 희생과 노력을 자랑하지 않아도 가족들이 저절로 느끼고 알게 돼 있습니다.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좀 알아 달라고 강요한다면 그게 꼴불견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소위 “상(相) 낸다”라고 표현합니다.
“누가 남들에게 자신의 정진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참 좋은 말씀입니다. 수행하고 정진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주머니에 송곳을 넣어 두면 어떻게 됩니까? 뾰족한 끝이 저절로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굳이 꺼내 보이지 않아도 그 주머니에 송곳이 들어 있다는 걸 남들이 다 압니다. 불법 공부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그러니 꼴불견 소리, 상 낸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빨래터에서 빨래하던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 붙들고 “여러분 제 옷이 더러워서 제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한다면 그 사람이 제정신이겠습니까? 그게 어디 자랑거리입니까?
불교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을 남들에게 보일 자랑거리로 여기는 사람은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공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웃지 못 할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토굴에 사는 스님이 평소에는 늘 게으름을 떨다가 저 아래 산어귀에서 사람들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방에 들어가서 떡하니 좌선하는 모습을 취하고는 했답니다. 사람들이 마당에 올라와 방 안까지 들여다보아도 모른 척 하고 근엄하게 앉아 있고는 했답니다. 수행이 무슨 쇼도 아니고,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지요.
“다만 스스로 마음 속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릴지언정 누가 능히 밖을 행해서 자기의 정진을 자랑하겠는가”라는 이 말씀 속에는 영가 스님의 개인 사정도 담겨 있습니다. 천태기관을 깊이 익혔던 영가 스님은 당시 천태종에서 법을 계승해 종파를 크게 일으킬 인물로 주목받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육조 스님의 법을 잇고 선종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많은 공격과 비난들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도대체 네가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깨달았기에 우리 천태종을 부정하고 그리 도도하게 구느냐?”는 힐난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신청곡 : 마음(강주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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