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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1 21:58:16, 조회 : 1,039,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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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회창폐불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이래 불교 전체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진 대규모 탄압이 4번 있었다. 첫 번째는 북위 태무제, 두 번째는 북주 무제, 세 번째는 당 무종, 네 번째는 후주 세종에 의한 폐불이다. 탄압 시의 황제 명을 따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부른다.
회창폐불會昌廢佛은 정사『구당서』나 『자치통감』 기록에 의하면, 845년(무종 회창 5년) 4 월부터 8월 사이에 단행된 사건이었다. 그 결과 천하의 사찰 4,600곳, 난야(작은 사찰) 4만여 곳이 훼손되고, 승니 26만 5천 명이 환속되었다. 또한 사찰이 소유한 비옥한 토지 수십만 경(1경은 5.8헥타르), 노비 15만 명을 국가에 몰수당했다. 환속자는 세금을 내는 호로 바뀌고, 불상과 불구佛具는 동전이나 농구 로 주조했다. 다만 장안과 낙양에 사찰 4곳, 각 주에 1곳만을 남겨, 각기 5~30명의 승려를 두도록 조치했다.
유교 교양을 지닌 관료와 도사의 반불교 여론이 무종의 배불을 재촉했다. 당대를 통해 사회에 깊게 침투하고 강대한 교단을 만든 불교계는 이 사건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갔다. 공식 기록으로는 845년의 수개 월 사이에 불어 닥친 폭풍우가 폐불의 중심이었다고 하지만, 실은 수년 전부터 위기가 배태되어 있었다.
무종은 즉위하자마자 노자의 탄생일을 강성절이라 하여 휴일로 정했고, 도사 조귀진을 중용 하여 도술에 탐닉했다. 폐불의 움직임은 842년 3월에 재상 이덕유(787~850)가 승니의 관리를 엄밀히 할 것을 진언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도망병과 범죄자 그리고 처자가 있으면서 승적에 있는 자는 환속시키고, 승니가 사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져, 장안성 내에서만 대략 3,500명이 환속했다.
844년 3월에 불아 공양을 금지하고, 아울러 오대산이나 서안으로부터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 리한 법문사 등의 사찰에서 불지를 가지고 신성한 네 장소에 순례하여 공양하는 것도 금지했다. 이 사실에서 당시 사리 신앙의 열광이나 오대산 순례 등의 배후에 있는 불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불교 대신에 도교를 믿는 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무종은 궁중에 구천도량을 지어 도교의 신들을 제사지내고, 7월 불교의 우란분회 행사 때에 도교의 흥당관에서 천존을 제사 지냈다. 또 천신과 교감하여 선인이 되는 선약을 제조하고자 궁중에 망선대를 축조했는데 높이가 약 45미터였다. 불교를 배격하고 도교를 숭배하는 흐름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도사 조귀진으로, 재상 이덕유는 그를 옆에서 도왔다.
여기서 반드시 반불교주의라고 할 수 없던 이덕유라는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재상 이길보(758~814)의 아들로 진사 출신 우승유(779~847)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당쟁, 이른바 우이의 당쟁을 일으킨 귀족 출신의 영수였다. 처음에는 재정의 건전을 꾀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를 받아 840년에 재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지방 재임 중에 불교계의 부패를 경험해 사찰에 숨은 사람들이나 은닉된 재산에 눈을 돌렸다.
사찰 폐지 · 승려 환속 · 사원 노비 및 전답 몰수 등의 조치는 불교계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줄 정도였다. 무종을 이은 선종(재위 847~859)이 즉위한 후 이러한 폐불령은 철회되지만 이후 선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파가 내리막길을 걷는다. 또 외래 종교인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도 사교로 배척되었다.
부처님의 향기 - 김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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