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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7 02:27:08, 조회 : 1,039,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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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원나라의 불교
① 원나라 왕조의 종교의식
1206년 테무친은 오논하 상류의 초지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식을 거행하고 칭기즈칸의 칭호를 얻었다. 그 뒤를 이은 우구데이는 1234년에 금나라의 애종(재위 1223~1224)을 압박하여 자살하게 만든 후에 금나라를 병합했다. 이후 뭉케칸(재위 1251~1259)이 남송을 정벌하는 도중에 죽자 1260년 4월에 쿠빌라이는 내몽골초원의 본거지인 개평부에서 자파의 쿠릴타이를 열어 6월에 황제에 즉위했다. 국호를 원이라 정하고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다. 마침내 1279년에는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
원나라는 다민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 역사상 다른 시대보다 많은 종교, 즉 유교 · 불교 · 도교 · 회교 · 야소교 · 마니교 등이 활동했다. 종교인을 바라보는 원나라의 기본적인 자세는 황제나 그 일족을 위해 ‘하늘에 고하여 복을 기원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것’ 이라는 표현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임무를 맡기기 위해 요역을 면제하고, 더 나아가서 종파에 따라서는 부세도 면제했다. 즉 그 활동이 반몽골적인 움직임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면 각 종교에 대한 원나라 왕조의 자세는 관용이었다.
세조(재위 1260~1294), 즉 쿠빌라이는 티베트불교계인 개원사 · 파스파제사사 사찰을 건립하고 방대한 토지를 사여했다. 1269년에는 대보녕사에서, 1277년에는 홍법사에서 『대장경』을 조인하고 이를 여러 나라에 반포했다. 또 경길상 등은 티베트 경전과 한역 경전을 비교 연구하여 후한부터 1285년에 이르는 1200여 년간의 불전 총목인 『지원법보감동총록』을 완성 했다. 이러한 숭불 작업의 결과 1291년에는 사찰 4만 2,318곳으로 사찰 및 승니의 수가 대폭 증가했다.
원나라 순제(재위 1333~1367) 연간에 각안은 삼황부터 남송까지의 역조세대와 인도 · 중국 불교에 관한 사적을 편년체로 수록한 『석씨계고략』을 완성했다.
불교 교단은 승니를 통괄하는 선정원 아래에 총통 · 승록 · 도강 · 부도강과 그 밖의 승관이 설치되었다. 지방에는 각 로 · 주에 승록사를 설치하고, 그 관하의 주에 승정사를 두고 승정과 부승정 각 1명을, 현에 도강 1명을 두었다. 강남에는 이들 지방 승관을 통괄하는 석교총통소를 두었는데, 이는 수도의 대도선정원에 직속되었다.
② 티베트 불교
원나라의 중심적인 불교 종파는 선종이다. 몽골정권 성립기에 조정의 신임을 얻어 불교계를 통괄하는 역할을 수행한 해운도 선승이었다. 또 최근에는 화북의 화엄종이나 강남의 자은종의 활동도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원나라 일대를 통해 정치적으로 커다란 힘을 가진 것은 티베트불교, 즉 라마교였다.
티베트는 7세기 중엽 송찬강보왕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어 그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크게 번창 했다. 몽골 조정과 티베트불교가 관련을 맺은 것은 1247년에 샤카파의 샤카판디타가 서량에 주둔해 있던 우구데이의 둘째 아들 쿠텐과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샤카판디타와 같이 온 자가 파스파(1235~1280) 였다. 숙부를 대신해 쿠빌라이를 알현한 파스파는 곧바로 신임을 얻었다. 1260년에는 칙명을 받아 몽골 문자(파스파 문자)를 제정했는데, 이 해 '국사’, 1269년에 ‘제사'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로써 불교 전체를 통솔할 수 있는 지위를 공인받았다. 1264년에는 총제원이 설치되어 불교 전체와 티베트의 행정을 담당했는데, 이들 부서는 파스파를 위해 설치되었다. 티베트에서는 제사가 내는 명령인 법지가, 황제가 내는 명령인 성지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파스파 이후에도 몽골 조정은 티베트 불교를 계속 신봉했다.
몽골 조정을 배후에 둔 티베트불교 세력은 한인 사회와 대립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1309년에 '티베트 승려를 때리면 팔을 자르고, 저주하는 자는 혀를 자른다'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또 『원사』에 1277년에 옛 남송 지역의 불교 지배자인 강남석교도총통 지위에 오른 탕구트의 티베트 승려인 양련진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남송의 제릉을 약탈하여 유해를 방치하고 등교 내의 재보를 탈취했으며 백성 50만 호를 강제적으로 사찰의 전호로 삼는 등 강권을 멋대로 행사했다. 이러한 행태를 부린 그는 재무 관료로 수완을 떨친 상가(?~1291)가 처형되자 1291년에 실각되었다.
이처럼 원나라 황실의 보호를 받은 티베트불교가 사회에 끼친 폐해는 대단히 컸다. 또한 궁정 내부에서 불교의식에 탐닉하고 거액의 비용을 사용하면서, 원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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