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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66
법광(法光) 2020-12-06 19:46:04, 조회 : 971, 추천 : 0



④ 도첩 발급과 매첩제
태조는 1372년에 승니와 도사에게 도첩을 발급했다. 당시 천하의 승니 도사 여관이 대략 5만 7,200 여 명이었다. 다음 해 8월 9만 6,328명에게 도첩을 발행했다. 그러나 승려의 급격한 증가는 재정을 축내고 민호의 수를 감소시킨다는 이유로 부주현에 대찰 한 곳만을 남기고 시험을 보아 『반야심경』 · 『금 강반야경』 · 『능가경』 등의 경전에 정통한 자에게만 도첩을 발급토록 했다.

1384년(홍무 17년)부터 도첩 발급은 3년에 1회로 규정했다. 일반 백성으로 20세 이상인 자는 승려가 되는 것을 불허하는 대신, 20세 이하의 자로 남경의 사찰에서 3년간 불사에 종사하여 청렴하고 결백하여 과오가 없는 자에 한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홍무 말에는 20세 이상이라도 부모가 관련 부서에 고하면, 그 부서가 상주하여 3년 후에 남경에서 경전에 통달했는가를 시험하여 도첩을 발급했다.

이러한 홍무제의 조법을 이어받은 영락제도 불교를 통제하는 과정 속에서 도첩 발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책을 펼쳤다. 승려 수가 점점 많아지자 3년에 1회 발급하던 도첩을 5년에 1회로 개정했다. 그러나 곧 승려의 대다수가 경전에 정통하지 않고 멋대로 머리를 깎는 폐해가 발생하자 규정을 새로이 정했다. 즉 10년에 1회 도첩을 발급하는 것으로 개정했고, 그것도 부는 40명, 주는 30명, 현은 20명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더욱이 승려가 되는 연령을 이전의 20세에서 40세 이상으로 높였다.

경태 연간에는 태감 흥안이 불교를 믿고 신봉하자, 흥안은 황제에게 3년 1회의 도첩 규정을 요청하여 승려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천순제 때에 재차 10년 1회 발급 규정을 준수하게 했다.

명나라 초에는 도첩을 청하는 승도의 수가 3만 6,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화 초가 되면 그 4배에 달하는 13만 2,2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성화 22년(1486)에는 22만 4,5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홍치 연간의 예부상서 예악(1444~1501)은 성화 연간의 승려와 도사 수를 50만 명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정통 연간 이후 기근 구제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한 군비 조달을 목적으로 미米 등의 곡물과 은銀 을 납부하는 대신 정식 승려임을 증명하는 도첩을 발급한다고 하는 매첩제가 개시되었다.

승려가 직접 쌀 5석을 납부하면 도첩을 발급토록 했다. 성화 연간에는 구황을 목적으로 쌀 10석에 서 15석 혹은 은 5냥(쌀로 환산하면 10석 정도)을 국가에 납부하면 도첩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액수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나는데, 특히 성화 연간부터는 새로이 공명도첩도 발급했다.

승관의 결원이 생겼을 경우, 쌀 220석 혹은 은 100냥을 납부하면 승관에 임명되었다.


⑤ 양명학과 불학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의 다툼은 매우 오래전부터였다. 송나라 이후 유학을 배우는 자들은 불교 비판을 환호했다. 명나라 때 왕양명(1472~1529)이 양지의 학문을 주창하면서부터 불교에 입문하는 자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양명학이 쇠퇴하면서 정주, 즉 정호(1032~1085) · 정이(1033~1107) 그리고 주희의 학문을 배우는 자들이 지역을 파고들어 유교와 불교의 논쟁은 재차 극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사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 팽소승(1740~1796)은 고인의 책을 읽고 같음과 다름을 변별하여 주자학과 양명학을 강설했다. 팽소승은 자신이 배웠던 것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불교의 가르침에 마음을 쏟아냈다. 양명학의 발전이 거사 불교 발흥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명나라의 불교는 교학적으로는 수 · 당 시대처럼 여러 종파가 논쟁을 통해 발흥한 기운이 없고, 또한 순수한 교의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두 가지 논점을 놓치고 있다. 첫째, 명나라 사상의 변화 · 발전에 불교가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둘째, 명나라 불교는 포교 · 사회 활동 면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명나라 사상에 불교가 끼친 영향은 다양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근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양계초(1873 ~ 1929)는 중국사상의 조류를 한나라의 경학, 수나라 당나라의 불학, 송나라 명나라의 이학, 청나라의 고증학 넷으로 분류했다. 실제로 송나라 명나라의 이학은 외유내불이라고 말해지듯, 불교 배격을 사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철학 체계는 불교에서 배우고 있다.

명나라 초의 송렴(1310~1381)은 노골적으로 불학에 접근한 학자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선학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제창한 심학은 단순히 주자나 육상산(1139~1193)의 흐름을 받아들인 것만이 아니라 불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불교의 영향이 더욱 커졌고, 마침내 왕양명에 이르렀다. 왕양명의 깨달음은 불교의 깨달음 그 자체였다. 양명학의 탄생은 이제까지 이단시된 경향이 있는 불교를 단숨에 되살려 냈다.

왕양명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불교의 종파는 선종이었다. 번뇌를 버리고 깨달음에 드는 여래선보다 조사선이 더 유행했다.





악의 열매 - 수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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