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head9.jpg
Home 방송안내 신행생활 음악수필 불교강좌
 
  운영자인사
  운영자소개
  방송시간표
  생방송듣기
  방송대화방
  윈앰프설치
  사이버연등
  후원금보시

무창포불교대학


  방송게시판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71
법광(法光) 2020-12-18 22:47:01, 조회 : 953, 추천 : 0



16 민국 시대 이후의 불교
1912년 2월 12일에 청나라 선통제(재위 1909~1911)는 위안스카이(1859~1916)가 요구한 조건을 수용하고 정식으로 퇴위를 고했다. 260년을 지속해 온 청나라는 이렇게 멸망했다.

① 묘산흥학운동
청나라 중기 이후로 전통적인 불교정책은 쇠퇴하게 되었다. 건륭제 이후 비밀결사 종교 활동이 활발해지고 관권의 엄중한 통제에도 반정부적 교비가 전국적으로 연이어 발생했다. 민간 종교의 비밀화 ᆞ비적화의 한 요인은 만주인 지배의 반감과 함께 종교 억압에 대한 반항이었다.

불교정책이 쇠퇴한 또 하나의 요인은 사회문제였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민족적 위기를 느낀 지식인들은 구국의 방안을 서양에서 찾으려 했다. 서양의 근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중국의 청년이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흡인력으로 작용했다. 전통문화와 불교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청나라의 운세가 쇠미해져 가는 가경(1796~1820) 연간 이후 불교는 현저히 쇠퇴하는 반면에 그 자리를 민중 종교가 차지했다. 가경제는 “불교와 도교는 믿을 수 없다. 하물며 서양의 종교는 말할 필요도 없다."라고 하여, 불교를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 시기가 되면 유교 학자는 한유의 벽불 견해를 내세워 전력을 다해 불교를 배격했다. 당시 승니의 도덕은 이미 난잡해졌고, 사묘는 유민들이 의탁하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변한 주요 요인으로 태평천국의 배불과 거사의 발흥을 들 수 있다. 기독교사상에 기초한 배상제교를 신봉하여 태평천국(1851~1864)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1814~1864)은 이교를 배척했다. 홍수전은 우상숭배 배격이라는 입장에서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사찰을 불태우거나 훼손했던 까닭에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다.

동치(1862~1874) 연간 이후 불교의 구규를 엄정히 하여 동남 지역의 불법은 부흥했다. 그러나 청 나라 말부터 민국 초에 걸쳐 승니의 자질저하와 사찰의 황폐는 사찰의 재산으로 초등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묘산흥학운동’으로 결정타를 맞게 되었다.

1840년에 발생한 아편 폐기를 둘러싸고 중국과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아편전쟁 이후 민족적 각성을 통한 자강 운동이 시작되었다. 서양 학문을 수용하자는 관료가 중심이 된 양무파의 대표적인 인물 호광총독 장지동(1837~1909)은 유교를 체體로 하고, 서학을 용用으로 하자'는 교육방침을 내세우고는 사묘의 재산 7/10을 이용하여 학교교육에 이용하자는 극단적인 폐불정책인 묘산흥학을 제시했다. 이 운동은 민국 시대가 되어서도 제기되었다. 난징 중양대학 교수 타이상추는 1928년에 “특수 계급으로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승려 군벌을 타도하라. 이 승려 군벌 하에 고통받는 민중들을 해방시켜라. 승려 군벌 소유의 묘산을 몰수하여 이를 가지고 교육 사업에 충당하자."라는 묘산흥학운동을 선언하고는 불교 교단을 압박하자 불교 측도 중국불교회를 설립하여 정부에 보호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시된 결과 토착호족과 군벌 등은 끊임없이 사찰의 재산을 침탈했다. 근대에 있어 삼무일종에 버금가는 법난이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개사곡) - 성종스님



  이전글 대보적경 제41권-12. 보살장회 ⑦/5) 사무... 법성화 2020-12-19
  다음글 무비스님의 증도가 강의-070 普德華 2020-12-18

목록으로 수정하기 삭제하기 추천하기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후원금보시함

신행상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