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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77
법광(法光) 2020-12-30 18:32:17, 조회 : 992, 추천 : 0



파윈선사는 1910년, 쉐리(1881~1933)와 그의 제자 마오궈(1884~1963)가 설립했다. 쉐리는 다른 불교 법맥과 달리 푸젠성 출신의 승려로서 중국불교 총림의 전통에 따라 계율을 강조했고 타이완에서 7차례에 걸쳐 계법을 전했다. 불교중학림을 창립하는 데 참여했고, 1928년 전창과 함께 파윈불학사를 열었다.

차오펑사파는 타이난에 자리한 카이위안사 출신의 이민(1875~1947)과 융딩(1877~1939) 이 차오펑사를 중심으로 발전시켰다. 이민은 타이난 카이위안사에서 출가하여 푸젠성 용취안사에서 계를 받았다. 1908년 제자 융딩과 함께 카이위안사를 떠나 가오슝 차오펑사에 주석했다. 융딩은 당시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수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비구니 수행을 위한 도량으로 룽후암을 세웠으며, 재교의 재고도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일제 시기에 일본 종파들은 자신들의 교세 확장을 위하여 사원이나 사당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들의 별원이나 분원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사대법맥 가운데 링취안선사와 파윈사파는 조동종에 소속되었고 링윈선사와 차오펑사는 임제종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일본불교 종파에 소속됨으로써 법률상이나 종교 활동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이 종교 활동에 대해 방임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발생한 시라이암 사건 이후이다. 당시 재교도인 위칭팡(1897~1915)은 동료들과 함께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는 항일운동을 펼쳤다. 농민들까지 함께했던 이 무력 투쟁으로 900명이 넘는 사람이 사형을 당했다. 일본은 이후로 민간의 종교 활동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대규모 활동을 통제했다.

일본불교계는 시라이암 사건 이전부터 재교를 포함하여 타이완불교계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1912년 조동종은 타이난의 재교와 함께 '애국불교회'를 조직하여 타이완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시라이암 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 참여했던 재교 조직보다 더 많은 조직들이 자 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불교회에 참여했다.

일본 당국이 일본불교와 타이완불교의 연합을 촉구했고 일본의 각 종파에서도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타이완불교 교육과 조직체를 담당하는 연합 조직이 성립되었다.

불교중학림은 일본 조동종에서 주도한 교육기관으로 타이완과 일본 승적의 출가자들이 교육을 담당하는 체계였다. 3년 교육과정을 마친 뒤에는 일본에서 중등과 불교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년 차 학생 모집 때에는 승려나 재우에 제한하지 않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1922년 전난학림이 폐교 되면서 불교중학림으로 편입되고 불교중학림 역시 후에 교육 법규에 따라 조동종중학림으로 바뀌었다. 불교계 교육기관이면서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고 출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타이완불교계와 재교계를 아우르는 연합 조직체로서 종교 단체의 성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당국의 관리를 받았다. 타이완과 일본의 승려들이 법회와 강연을 주관했으며 신사종교 문제, 황국 정신, 일본불교사, 진종개론, 근대 일본불교 등의 내용과 일본어와 일본 국가에 대한 교육도 함께 이뤄졌다. 난잉불교회에서 발간하는 『난잉불교』는 일본 점령 말기에 일본어로 발행되기도 했다.

일본의 교육과 관리를 받으면서 타이완불교는 선과 정토 중심의 대륙 불교와 점차 단절되고 일본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 유학을 경험한 출가자들이 타이완불교계의 교육과 조직을 담당하면서 일본화의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20년에 성립한 재교 연합체인 '타이완불교 룽화회'는 재당에서 사용하는 경문이나 의식 등을 모두 일본불교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교는 본래 선종에 근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선종 계통, 특히 조동종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제 말기 황민화 정책에 호응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황민화 운동을 통해 일본어의 보급은 물론, 신사와 황실에 대한 숭배와 존중을 강요했다. 특히 사묘 정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신상이나 불상이 훼손되는 등 민간의 종교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운동은 민간신앙을 개선한다는 취지였기 때문에 불교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다. 그러나 황민화 운동이 격화되면서 사원에서는 일본이나 타이완의 불교중학림에 반드시 출가 승려를 파견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 황국 불교화를 강화하는 조치가 이뤄졌다.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타이완불교계의 변화는 자성에 의해서라기보다 일본화와 일본불교로의 변화라는 한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점은 수계 활동이 여전히 푸젠성 용취안사에서 이뤄지면서도 비용만 지불하면 수계증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과 여성 출가자들은 계를 받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해방 이후, 타이완 불교계에 본토화와 주체화의 문제가 대두되었던 이유는 당시 불교계에 퍼져 있던 이러한 분위기에 따른 것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 홍순지

운암(雲庵) [2020-12-31] : 법광 거사님 세계 불교사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맞이하는 신축년 건강하시고 댁내에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합장
오도행 [2020-12-31] : 법광거사님 한해도 수고하신 덕분에 알음알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건강하시기 바랍니다.합장
법광(法光) [2021-01-01] : 감사합니다. 불심사 도반님들 모두 새해 많은 복과 건강 및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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