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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6 15:09:20, 조회 : 1,034,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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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보살[菩薩]이 장엄불토부아[莊嚴佛土不]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 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는 즉비장엄[卽非莊嚴]일새 시명장엄[是名莊嚴]이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살이 세상을 장엄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보살이 세상을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며,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보살들이 이 세상을 장엄하는 문제에 대해 거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성공이 그가 사는 마을, 나라를 빛냅니다. 이것이 그 마을, 그 나라를 장엄하는 일입니다.
보살이 이 세상을 장엄하는 일은 그에 비견할 바가 아닐 정도로 대단하지만 금강경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합니다. 보살이 크게 헌신하여 세상에 부탬이 되고 빛이 된다 하더라도 어떤 관념이나 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생색을 낸다면 그것은 온전치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서예가인 추천 선생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 가서 서실을 했는데, 가끔 부산에 내려와서 만날 때마다 "청남 오대봉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부산에 와도 부산이 텅 빈 것 같아서 허전하다."고 하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불교신자들에게는 큰스님이 없으면 그 도시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고, 예술인들에게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없으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보살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보살 같은 위대한 인격자가 많아야 그 나라를 장엄할 수 있지만, 그것도 무상[無相]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그 이름이 장엄이라는 '즉비장엄 시명장엄'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분량이 얼마 안 되는 금강경에서 이 말이 30여 차례나 반복되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금강경을 푸는 좋은 열쇠가 됩니다.
단어의 빈도로 봐서도 "금강경은 즉비의 철학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A는 즉비[卽非] A일새 시명[是名] A이다'라고 하는 논리구조가 계속 되는데, 이 논리는 어떤 것에도 해당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름 없던 작은 마을에 출세한 사람이 나와서 그 마을이
어느 순간 '세상에 떴다'먄 그 마을이 장엄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우선 그 마을이 있었고, 부모가 있었고, 그 부모의 부모가 있었고, 계속해서 찾다보면 그가 혼자서 마을을 장엄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살이라 할 만한 훌륭한 이가 세상을 빛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 사람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 모든 환경이 어우러져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엄의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 환상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한 일에 들떠 우쭐합니다. 그 들뜸 역시 며칠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지라
허전해지고, 그러한 것이 지나치면 병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은 것도, 보살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는 것도 이름이 그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그에 대해서 어떤 관념에 떨어졌다면 그것은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니고, 관념을 가지는 순간 온갖 좋지 못한 것들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是故[시고] 須菩提[수보리]야 諸菩薩摩訶薩[제보살마하살]이 應如是生淸淨心[응여시생청정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이요.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而生其心[이생기심]이니라.
"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텅 빈(淸淨) 마음을 낼지니라.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마음을 낼 것이며, 반드시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그 외의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
청정하다 하면 맑다. 깨끗하다는 뜻을 먼저 생각하는데, 불교에서는 대부분 '아주 뛰어나고 훌륭하다', '텅 비었다'라는 뜻으로 씁니다. '보살은 반드시 텅 빈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은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기를 완전히 비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상四相과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다 떠나보낸 수승한 마음입니다.
금강경 제2 사구계가 나오는 대목으로 텅 빈 마음, 청정심에 대한 설명을 간단명료하게 하고 있습니다. "응당히 어떤 사물(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되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서도 안 된다. 응당 머무러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색.성.향.미.촉.법은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렇듯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 어떤 종교에도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정확히 분류한 이론이 없습니다.
'응무소주응무소주 이생기심이생기심', 집안에 금강경 사구게 구절을 걸어 놓으면 아주 좋습니다. 이 또한 '이것이다.'라는 고정된 관념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금강경과 관계없 이 구절만 따로 놓고 생각해 봐도 말할 수 없이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육조 혜능 스님도 이 구절에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처음에 이 구절을 들을 때 육조 혜능 스님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무식한 나무꾼이었습니다. 불교 교리는 물론이고 부처님이나 사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하루하루 땔나무를 해서 시장에 팔아 겨우겨우연명하는 사람이 어느날 우연히 이 구절을 듣고 마음이 환히 열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 그때는 견성인지 성불인지 몰랐습니다. 견성이나 성불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그것을 설명하느라 지어낸 말입니다. 그것이 뭔지 몰라도 육조 혜는 스님처럼 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자 무식이었던 육조 혜능 스님은 금강경의 이 대목을 듣고 깨달은 내용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기자성본자청정 何期自性本自淸淨
하기자성본불생멸 何期自性本佛生滅
하기자성본자구족 何期自性本自具足
하기자성본무동요 何期自性本無動搖
하기자성능생만법 何期自性能生萬法
나의 자성이 본래 저절로 청정하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
나의 자성이 본래로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본래 저절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본래로 아무런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자성이 능히 일체 만법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육조 혜능 스님의 오도송은 이렇게 감동에 겨워서 깨달은 바를 탄복하는 내용입니다. '내 자신이 천하고 더러운 줄알았는데 본래 훌륭하고 청정한 줄을 알게되니 신기하다. 우리의 궁극적인 차원은 결코 생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신기하다. 나는 정말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백성에 불과했는데 알고 보니 무한한 무한한 보물과 온갖 풍요로움을 내 자신 속에 다 갖추고 있으니, 이러한 사실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대한불교조계종은 육조 혜능 스님이 머물던 조계산에서 그 이름을 따 왔습니다. 거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육조 혜능 스님은 우리나라 선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선불교를 표방하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근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의지하여 수행의 지침, 삶의 지침으로 삼는 까닭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바로 이 구절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어떤 틀을 만들어 매달립니다. 그것에서 벗언나야 할 상황이 오면 괴로워하고 갈등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본래로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갈등할 이유가 없습니다.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죽은 사람의 마음이나 안 변하지 살아 있는마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이 살았던 시대에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토대로 한 충과 효가 인생의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물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육조 혜능 스님처럼홀어머니를 부양하면서 충직하게 살았던 사람이 당당하게 출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의 더 위대한 가치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출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고정관념, 자기만의 틀, 자기가 만든 한계에 집착하고 매달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법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불자들이 중국의 조계산 남화선사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육조 혜능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고 그 덕화를 그리워 합니다. 단순히 육조 혜능 스님을 기리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을 깨닫고 진정으로 보람찬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보리야, 譬如有人(비여유인)이 身如須彌山王(신여수미산왕)하면 어의운하오. 是身(시신)이 爲大不(위대부)아. 수보리언하사대 甚大(심대)니다. 세존이시여. 하이고오 佛說非身(불설비신)이 是名大身(시명대신)이니다.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하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습니다.
"아주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몸이 아니며,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논리구조라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몸은 곧 몸이 아니라 이 이름이 몸입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수미산만한 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 킹콩, 쥬라기 공원 등 30-40층 빌딩만한 변종 동물들이 나타나서 건물들을 부수는 영화들이 더러 나왔습니다. 21세기에 기껏 생각해 낸다는 것이 건물 30-40층 높이만한 몸뚱이인데 3,000년 전에 설한 금강경에서는 수미산만한 몸뚱이, 하늘의 지붕이라고 하는 큰 몸뚱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하지 않는 것, 그 속뜻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상' 덩어리가 어쩌면 저 설산, 히말라야 산만큼 크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들의 심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린아이, 어른,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등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상이 수미산만한 겁니다. 형상이 없어서 다행이지 형상이 있다면 60억 인구라면 히말라야 산 60억 개를 나열해야 합니다.
수미산을 히말라야 산이라고도 합니다. 실제로 티베트 사람들은 히말라야 산 옆 해발 6,000미터쯤 되는 삼각형처럼 한 덩어리로 생긴 산을 수미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티베트 사람들이 그 산을 수미산이라고 하든, 인도 입장에서 히말라야 산 전체를 수미산이라고 생각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 내용을 알고 보면 내가 쌓은 공덕, 업적, 수고, 잘난 체함등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몸이 아니며'라고 하는 말은, 마음의 몸인 까닭에 상이 없고 툭 트였으므로 육신의 제약을 받지 않는 진실로 큰 몸을 일컫는 말입니다. 무한히 깊고 큰 마음의 몸이 참으로 큰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보살이 불터를 장엄한다는 것은 절을 크게 짓고, 불상을 천만 개씩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자유롭고 활달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청곡 : 홀로 사는 즐거움(김현성과 움직이는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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