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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19:13:12, 조회 : 1,033,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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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바 없이 보시하라.
수보리須菩提야 우념과거어오백세又念過去於五百世에 작인욕선인作忍辱仙人하야 어이소세於爾所世에 무아상無我相하며 무인상無人相하며 무중생상無衆生相하며 무수자상無壽者相이니라 시고是故로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은 응리일체상應離一切相하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溽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이니라 약심유주若心有住면 즉위비주卽爲非住니 시고是故로 불설보살佛菩薩은 심불응주색보시心不應住色布施라하니라
수보리야, 또 기억해 보니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 동안 인욕선인이 되었을 때가 있었노라. 그 세상에서도 나라는 상이 없었으며, 남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상도 없었으며, 수명에 대한 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일체의 상을 떠나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라.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야 하며, 반드시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감촉이나 그 외에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야 한다. 반드시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으면 곧 머물지 않는 것이 된다.그러므로 여래는 말하기를 ‘보살은 마음이 반드시 사물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 고 하느니라.
이 대목이 부처님의 과거 오백세 전에 인욕선인으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설화입니다.
가리왕이 신하들과 시녀들을 데리고 사냥을 갔다가 점심을 먹고 곤히 잠들었습니다. 가리왕이 잠들어 있는 동안 시녀들은 수행자에게 가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왕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 신하와 시녀들을 찾았는데 그들이 수행자를 우러러 보며 법문을 듣는 모습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가리왕이 수행자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묻자, 수행자는 고요히 인욕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가리왕이 칼을 뽑아 인욕선인의 신체를 잘라내며 “아프지 않느냐? 원망하는 마음이 나지 않느냐?”고 하자,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무엇이 아프고 누구를 원망 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가리왕이 인욕선인의 신체를 갈기갈기 잘라내자 마침내 하늘에서 우레가 치고, 왕은 기절을 하고, 잘렸던 팔이랑 다리가 회복되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뒤이어 보살을 상을 떠나서 발심을 하고,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발심하는 것이고, 상이 있으면 진정한 발심이 안 되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상 떠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이라 하여 반드시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머물렀다고 할 때 벌써 흘러가고 있어요.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이 내용은 금강경 사구계의 한 구절인 ‘응무소주이생기심’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다른 경전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장의 표현도 강합니다.
‘반드시, 틀림없이’라는 뜻의 응應자도 많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불응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응당 어떤 사물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어떤 방향으로든지 항상 흘러가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어딘가에 머물러서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우리 일상에서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구절이 매우 많습니다.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를 낼지니라〔應生無所住心〕.”하는 구절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에 머물러 집착하면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다가는 ‘배신당했느니, 의리가 없느니’하고 안달합니다. 그런데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나도 흘러가고 남도 흘러갑니다. 스스로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삶입니다. 하나하나의 대상에 갇히지 말고,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을 때, 집착하지 않을 때 그 무엇에도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자비 보시를 베풀 수 있는 큰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수박 껍질을 벗겨야 맛있는 수박을 먹을 수 있고, 매미도 한 꺼풀을 벗어나야 성충成蟲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한정짓는 온갖 상에서 벗어나 머물지 않을 때 진정 행복한 삶이 활짝 열립니다.
인류의 격이 부처로 올라가다
수보리須菩提야 보살菩薩이 위이익일체중생爲利益一切衆生하야 응여시보시應如是布施니라 여래如來가 설일체제상說一切諸相이 즉시비상卽是非相이며 우설일체중생又說一切衆生이 즉비중생則非衆生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는 시진어자是眞語者며 실어자實語者며 여어자如語者며 불광어자不誑語者며 불이어자不異語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소득법如來所得法은 차법此法이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여래가 말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며, 또 일체 중생도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만 하는 사람이며,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며, 진리의 말만 하는 사람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며, 사실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보살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베풉니다. 요양원에 가서 노인들 목욕을 시켜드리거나 빨래와 청소를 해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 밥 한 끼, 책 한 권, 염주 하나를 선물하는 것 등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들은 다 보시입니다. 그런데 보시 역시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해야 합니다. 보살의 삶은 베푸는 것이기에 보살에게 있어 보시는 그대로 삶입니다.
금강경에 ‘즉비’라는 말이 스무 번 이상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도 즉시비상과 즉비중생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상은 실체가 없으며 고정된 것도 이니므로 없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만일 상이라고 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부처님께서 ‘상을 떠나라’ ‘상을 내지 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설한 일체상은 곧 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상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쩌다 상을 좀 내더라도 크게 두려워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생 역시 마찬가지로 즉비중생입니다. 중생이 실재하지 않는다
는 것은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으로써 얼마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성인이나 부처님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좀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중생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편의상 중생이라고 이름을 쓸 뿐이지 사실은 모두가 부처입니다. 그런데 중생이라는 생각이 골수까지 배어있습니다. 걸핏하면 “중생이 그렇지 뭐.”라고 합니다. 흔히 나쁜 짓을 할 때 “나는 중생이다.”라고 변명합니다. 이 잘못된 생각, 행동을 고쳐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모두 부처라는 자각을 가지고 부처노릇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편 부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의 진실성에 대해서 다섯 번이나 간곡하게 증명하고 계십니다. 불교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중생이 중생이 아니다. 그 이름이 중생이다.”라는 말을 듣고 의아해 합니다.
부처님은 그동안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깨달음이 깨달음이 아니고, 설법이 설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요, 깨달음이요, 설법이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고 단지 그 이름일 뿐이라고 하였으니 초심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점도 있지만, 자신을 저급하게 취급하는 습, 중생이라는 집착에 너무 굳어져 있어서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다[是眞語者]’‘실다운 것만 말하는 사람이다[實語者]’ ‘진리와 똑같은 것만 말하는 사람이다][如語者]’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不誑語者]’ ‘사실과 다르지 않은 말만 하는 사람이다[不異語者]’라고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간곡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얻으신 법이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연등불에게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것, 역사적으로는 부처님이 29세에 출가하여 6년 고행을 하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것이 여래가 얻은 법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간이 죄 많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고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덕분에 인류 전체가 부처의 격으로 올라갔습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에 ‘사람은 그대로 부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거나 업장 많은 중생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방편이거나 생명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청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모조품이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의 위대함은 사람의가치를 제대로 본 데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당신이 발견한 그 깨달음마저도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깨달음마저도 깨달았다고 하는 관념에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신청곡 : 부처님이여(야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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