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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으로 보는 세계 불교사 132
법광(法光) 2021-06-21 01:10:24, 조회 : 1,011, 추천 : 0



② 초 트룽빠
티베트불교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1970년대 파격적이고 대담한 행동으로 유명한 초걍 트룽빠(1937~1987)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까규빠의 제11대 트룽빠 툴쿠로서 서양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자기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탁월한 영어 구사력을 바탕으로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부드럽고 명쾌한 현대어로 설명함으로써 티베트불교를 서양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트룽빠는 1959년 망명한 달라이라마의 뒤를 이어 인도로 건너갔다가 1963년 영국으로 갔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으로 학위를 받고 1967년 아콩 린포체(1939~ )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첫 번째 서양 티베트 사원인 삼예링을 창건했다. 이 사찰은 유럽 제일의 티베트 사원이 되었지만 트룽빠는 이미 그전에 아콩 린포체와의 갈등으로 떠난 뒤였다.

1969년 트룽빠는 영국시민권을 획득했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몸 왼쪽이 마비되어 오랫동안 요양해야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승려의 삶을 포기하고 재가자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불교가 서양에 뿌리내리려면 문화적 장식이나 종교적 복식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그에 따라 '가사 뒤에 자신을 감추고 숨어사는 생활'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기로 결심했다. 승적의 포기는 그에게 불법에 대한 헌신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해 당시 16세가 된 제자 다이애나 파이버스와 결혼한 후, 영국 사회의 비난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는 버몬트 버넷에 불교 명상과 불교학 센터 '호랑이 꼬리'를 설립하고 1971년부터 콜로라도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로키 산 다르마 센터를 창건했다. 이 센터는 후에 샴발라 마운틴 센터로 이름을 바꾸었다.

트룽빠는 당시 동양의 정신성에 대한 미국인의 열광을 물질적, 상업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신의 슈퍼 마켓'이라고 불렀다. 그는 구도자가 정신성을 '궁극적 성취'로, 다시 말해 '에고'의 강박적 욕망에 의해 추동된 ‘일종의 성취'로 만듦으로써 미묘하게 자신에게 아첨하고 속이는 것을 '정신적 물질주의'라고 일컫고, 수행의 궁극적 지점은 '에고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대안으로 '미친 지혜'를 주장했다. '정신적 물질주의'가 '우리가 되고 싶은 것에 가까이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미친 지혜'는 '나 자신인 그대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미친 지혜는 고통이 삶의 일부이며 기쁨과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는 인간 존재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거나,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본래 풍요로운 존재이며 그래서 자기를 활짝 열 수 있다는 것, 바로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의 길이 시작된다고 믿는 것이 진정한 마음공부라고 주장했다. 트룽빠는 좌선 명상의 단순성과 직접성이 그릇된 마음공부를 바로잡는 방법이며 말빠나 밀라 레빠가 사용했던 감정적이고 육체적 극한을 활용하는 방법을 '미친 지혜'와 동일시했다.

트룽빠는 어떤 틀에도 얽매이기를 거부했으며 제자들에게도 단호하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제자들에게 정신적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마리화나를 끊도록 했지만, 자신은 결혼생활 도중에도 제자들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때론 과음으로 법문할 때 비틀거리기조차 했다. 그는 자신의 음주, 흡연, 섹스가 '미친 지혜' 그 자체라고 주장했는데, 법문뿐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자신의 방법을 증명해 보였다.

트룽빠의 행동은 대부분 고의적이었다고 주장되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긴스버그는 트룽빠의 방법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끝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샌프란시스코 선 센터의 스즈키는 트룽빠의 기이한 행위를 이해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1971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격을 뛰어넘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불교의 통합 적인 성격을 잘 보여 준다.

1973년 트룽빠는 콜로라도 볼더에 오늘날 국제 샴발라가 된 금강계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현재 전 세계에 100여 개의 센터를 두고 있으며 격월간지 『샴발라의 태양』을 발간하는 등, 서양 불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행 공동체이다. 1976년 확립된 샴발라 교육은 세속적인 훈련 체계로서, 재가자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깨달음의 원칙과 고귀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착하며 세상은 성스럽기 때문에 전통적인 종교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교육을 이수하면 사회에 만연한 지배의 정치학, 권위주의적 인간관계가 끝을 맺고 명료하고 온화하며 건강한 정신이 배양되어 불국토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룽빠의 교육 이념은 『샴발라: 전사의 성스러운 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974년 그는 콜로라도에 나로파 연구소를 창립했다. 1997년 정식 인가를 받아 첫 번째 불교대학인 나로파대학으로 발전했다. 트룽빠 자신을 비롯하여 생태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다가 구루가 된 램 다스, 시인 앨런 긴스버그, 문학가 윌리엄 버로우 등 뛰어난 강사진들이 명상, 기공, 탱화, 다도, 티베트어, 산스끄리뜨, 중관철학, 심리학 등을 가르쳤다.

또 명상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고 불교를 삶의 현장에 적용시키고자 학생들에게 인근의 병원, 양로원, 호스피스 병원에서 실습하도록 했다. 석사과정에는 불교학, 글쓰기, 노인학, 참여불교, 심리치료학 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트룽빠의 천재적 언어 감각과 풍부한 감성은 그때까지 서양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어려운 불교 용어와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또한 1975년 티베트어와 산스끄리뜨어로 쓰인 불교 문헌 번역을 지원하는 날란다 번역재단과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불교출판사인 샴발라 출판사를 설립했다.

트룽빠는 젊은 시절에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과 수년간의 과음,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다가 1987년 캐나다에서 임종을 맞았다. 1976년 후계자로 지목된 외셀 텐진이 뒤를 이었으나 1988년에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 전까지 텐진은 그 사실을 파트너에게 알리지 않았고 보호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감염되었고, 1991년 텐진은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에이즈로 숨졌다. 그 후 트룽빠의 맏아들인 27세의 사콩 미팜 린포체(1962~ )가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트룽빠의 기이한 행동과 제자들의 도덕적 타락, 당시 미국 명상 센터에서 은폐되었던 도덕적 방종과 타락이 드러나면서 스승의 권위와 깨달음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발생했다. 트룽빠의 삶은 오늘날 미국에서 깨달음의 초월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준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그 무엇이 나 일런고 - 능인스님

眞虛性宗 [2021-06-21] : 법광 거사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세계불교사는 모레 6월 23일(수요일) 아침방송에서 공부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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