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방송게시판
|
|
|
|
![]()
|
|
2021-06-24 20:02:06, 조회 : 947, 추천 : 0 |
|
|
|
자기 불교 보따리에서 벗어나면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에 於燃燈佛前(어연등불전)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하야 悉皆供養承事(실개공양승사)하야 無空過者(무공과자)니라.
若復有人(약부유인)이 於後末世(어후말세)에 能受持讀誦此經(능수지독송차경)하면 所得功德(소득공덕)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
(어아소공양제불공덕)으로 百分(백분)에 不及一(불급일)이며 千萬億分(천만억분)과 乃至算數譬喩(내지산수비유)로 所不能及(소불능급)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기억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겁 전 연등부처님 이전에 팔백사천만 억 나유타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다 공양을 올리고, 받들어 섬겼느니라.
만약 다시 또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다면, 그가 얻은 공덕은 내가 저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천만 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산수와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念(염)자는 기억한다는 뜻이고, 阿僧紙(아승지, asamkhya)는 표현할 수 없는 수를 나타내는 산스크리스트어의 독음입니다.
得値(득치)는 만났다는 뜻이고, 那由他(나유타, nayuta)는 천만 억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셔서 6년 고행하시고 성불하신 분으로 역사가 증명하는 부처님입니다. 연등불은 다른 경전에도 등장하는데 과거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를 준 부처님입니다. 연등불의 실존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팔백 사천만 억 나유타 제불이라고 하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대승경전에서 이렇게 많은 부처님, '무량제불'이라 표현하는 근본취지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로 보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도 걸핏하면 극미진수 부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극미진수란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먼지를 뜻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세상 모든 생명이 부처라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은 모든 생명이 부처님이다, 좁혀서 말하면 제가 늘 강조하는
人佛(인불),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사람이 신입니다. 사람이 신을 만들었습니다. 신의 어머니는 사람입니다. 사람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습니다. 신, 성인, 부처, 보살, 아라한, 至人(지인)등 경지에 오른 분들이 다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정신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법당에 초 한 개 안 켜고, 향 한 줄 안 피우더라도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는 그러한 숨은 뜻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나올 경전의 가치와 비교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수 많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후말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로 보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공 올리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앞에서 축원을 할 때도 꼭 분명하게 들리도록 '누구누구 保體(보체)'라고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불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늘 그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많고 많은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공덕이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과 비교하였을 때, 백분의 일, 천만 억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불교를 바르게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 공부가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가끔 '자기 불교 보따리'라는 표현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자기 식의 불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집에서 자기가 만든 불교 보따리를 싸가지고 절에 올 때고 들고 옵니다. 법사가 어떤 설법을 하든, 경전에 무슨 말이 있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싸놓은 보따리를 풀어서 자기 수준대로 공부하다가 또 고스라니 그 보따리를 들고 내려갑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분들은 일단 '자기 불교 보따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니 금강경을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相(상)이 놓아지고 我(아)가 사라지고 집착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기 불교 보따리'도 없어질 것입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어후말세於後末世에 유수지독송차경有受持讀誦此經하는 소득공덕所得功德을 아약구설자我若具說者면 혹유인문或有人聞하고 심즉광란心卽狂亂하야 호의불신狐疑不信하리라 수보리須菩提야 당지시경의當知是經義는 불가사의不可思議며 과보果報도 역불가사의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이 다음 말세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 이가 있으면, 그가 얻은 공덕을 내가 만약 다 갖추어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곧 미치고 어지러워져서 의심하며 믿지 아니할 것이다. 수보리야, 반드시 알라. 이 경의 뜻은 상상할 수가 없으며, 그 과보도 역시 상상할 수 없느니라.”
앞에서 삼천대천세계의 금은보화 무더기를 보시한 것보다도 금강경이 더 훌륭하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이 몸을 아침과 점심, 저녁에 항하의 모래숫자처럼 많이 보시한 것보다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설해 준 것이 더 이 위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통사람이 이해할 수 없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비유를 들어 금강경의 공덕에 대해 말씀해 놓고서도 부처님께서는 경전의 공덕에 대해 조금밖에 설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금강경의 공덕을 다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바로 비쳐버릴 거하고 하셨습니다. 호狐자도 의심한다는 뜻이므로 호의불신이란 의심하고 의심해서 믿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저런 말씀을 하다니, 부처님이 아니라 마구니가 부처의 형상을 지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인가?’라고까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지경공덕분이나 지금 능정업장분이나 모두가 경전의 공덕을 말한 것입니다. 금강경의 의미가 얼마나 깊고 깊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금강경의 뜻은 좁은 소견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헤아리는 사량 분별을 초월해서 직관으로 알 수 있어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다”하는 말을 자주 하는데, 불자들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비록 중생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존재 가치는 너무나도 위대하다. 그것을 부처라고 표현해도 아무 손색이 없다’라고 금세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쨌든 콩을 심으면 콩이 열리고, 팥을 심으면 팥이 열리듯이 금강경의 뜻이 불가사의하므로 이 경전을 공부한 과보 역시 불가사의합니다. 경전을 공부한 것은 원인이 되고, 거기에 따른 공덕은 과보가 됩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 과보 역시 불가사의할까요?
제가 탄허 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일입니다. 탄허 스님께서 화엄경을 번역하시면서 통현 장자의 것을 저본으로 삼으시는 것을 보고 ‘왜 유명한 스님의 화엄경소초를 놔두고 거사(통현 장자)의 것을 번역하시느냐’고 여쭌 적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청량 도사의 글은 아름답고 표현이 좋아. 하지만 글이 거칠고 형편없어도 통현 장자는 구절구절마다 화엄경의 종지를 나타내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읽는 사람이 근본 취지를 잃어버릴까봐 수시로 짚어주는 겁니다. 금강경도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계속 짚어주고 또 짚어주고 있습니다. 어떤 경전을 공부하든지 불교의 근본 취지를 상기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불가사의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불가사의합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이 가장 불가사의합니다. 육신이야 과학적으로 거의 다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마음까지 포함해서 사람을 생각하면 사람같이 넓고 크고 아득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는 없습니다.
여기서 금강경의 의미가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는데, 결국 금강경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 넓고 깊은 마음의 세계까지도 다 꿰뚫어서 나의 살림살이, 내 삶으로 해야 합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으면서도 활용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복과 지혜, 덕을 계발하는 작업입니다. 불가사의한 사람의 능력을 일깨워주고 계발시키는 경전이기 때문에 금강경을 위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어찌 보면 심하다고 할 정도로 금강경을 찬탄하는 것에 내용의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데, 다 그만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주 언급함으로써 금강경을 공부하는 마음을 북돋는 것입니다. ‘그동안 업장이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에 걸렸는데 아, 됐다, 금강경 하나만 평생 수지 독송하고 사경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 주면 업장 소멸은 물론이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구나’하는 마음자세를 확고하게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입니다.
신청곡 : 심우도頌(김무한) |
|
|
|
|
|
|
|
|
|
|
|
|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