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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스님 新금강경 강의-036
普德華 2021-06-26 16:04:04, 조회 : 962, 추천 : 0
금강경 제 17분, 철저히 아我가 없다(究竟無我分)

무아無我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제17분은 무아에 대해 철저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무아는 모든 존재의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필 한 자루가 눈앞에 있어도 이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육신도 마찬가지이고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산하대지 만물이 모두 주체적인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라고 합니다.

무아를 설명할 때 가유(假有)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바퀴, 운전대, 타이어 등등 2만여 개의 부품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자동차 부품을 낱낱이 떼어냈을 때, 바퀴를 자동차라고 할 수 없고, 운전대를 자동차라고 할 수 없습니다. 2만여개의 부품이 모두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조립되어 있을 때만 자동차로 불립니다.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육신도 크게는 하나하나 떼어내면 육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아我와 아소我所로 이루어졌고, 세분하여 오위백법(五位百法)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잠깐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는 까닭에 거짓으로 존
재한다고 하고, 실체가 없는 무아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무아이고, 그 다음은 유아다 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무아라는 의미에서 ‘구경무아’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나라고 할 것은 없지만, 무아는 온 법계에 여여하고 밝고 깨끗하고 참다운 반야성품이 본래로 충만해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제17 구경무아분의 문답을 살펴보면 앞의 제2 선현기청분과
제3 대승정종분의 문답과 내용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뜻은 다릅니다. 초심자 입장에서의 질문과 공부한 사람의 질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친 번뇌를 끊는 일과 미세한 번뇌를 끊는 일에 대한 것인지라 질문은 같아도 뜻은 전혀 다릅니다. 부처님의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에는 오직 짠물뿐이듯이 반야의 세계에서는 오직 반야만 있
을 뿐입니다. 반야란 무엇인가? 무상이요, 무아입니다. 반야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무상이며, 무아뿐입니다. 그래서 구경에도 무아라고 한 것입니다. 끝까지 철저히 밝고 깨끗하여 어디에도 나라는 것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반야는 초심자든 익숙한 사람이든 범부든 성인이든 무상無相· 무아無我로 으뜸을 삼습니다. 그래야 일체 법이 모두 불법이 됩니다. 온 법계 진진찰찰이 다 불성을 갖추었고 반야를 갖추었습니다. 나에 매달리고 상에 매달리면 온 우주에 충만한 반야지혜를 쓸 수 없습니다.

존재의 실다운 모습이 공성임을 알고, 무아로 으뜸을 삼을 때 일체 법이 모두 불법이 됩니다. 그럴 때 본래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무한 가치를 누리면서 가볍고,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상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이시爾時에 수보리須菩提가 백불언白佛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니는 운하응주云何應住며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하사대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당생여시심當生如是心이니 아응멸도일체중생我應滅度一切衆生하대 멸도일체중생이 滅度一切衆生已나 이무유일중생而無有一衆生도 실멸도자實滅度者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약보살若菩薩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즉비보살則非菩薩이니라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수보리須菩提야 실무유법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니라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머물며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노라. 그리고 일체 중생들을 다 제도하였으나 한 중생도 실은 제도한 것이 없노라.’라고 하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과 남이라는 상과 중생이라는 상과 수명에 대한 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제2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던 내용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하고 수보리가 재확인을 하는 입장에서 여쭙고 있습니다.

아응멸도我應滅度라고 할 때 멸도라고 하는 말은 ‘제도한다’ ‘교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체 중생을 제도하였지만 “한 중생도 실로 제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3 대승정종분에서도 똑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셨는데 왜 한 중생도 제도하신 적이 없다고 하셨는지에 대해 여쭙자,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생이든 부처든 편의상 붙여놓은 이름입니다. 우리들은 이대로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제도를 하고, 교화를 하고, 어떤 경지로 끌어올려 놓았다 하더라도 출발했을 때의 그 사람입니다. 본래로 우리 인간은 누구나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제도라면 제도이고 교화라면 교화입니다. 그렇다 해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한 중생도 멸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제3 대승정종분에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대승정종,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고 했습니다. 보살이 설령 제도했다 하더라도 이미 있는 것을 이해시킨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가지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낸다면 보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알면, 사람을 부처님으로 공경하고 받들어 섬깁니다. ‘저 사람을 내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속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생색도 낼 수 있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또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생색내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면서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낸 것 조차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연이 되어서 불교에 귀의하여 발심을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없습니다. 불자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면 교인처럼 보이고, 교인이 법당에 와서 법회를 보면서 불자라고 해도 그 속을 모릅니다. 마음을 내는 것은 흔적이 없고 실체도 없습니다. 보리심을 발하는 것도 실체가 없는데 그 밖의 일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철저히 무아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청곡 : 내려 놓으시게(도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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