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방송게시판
|
|
|
|
![]()
|
|
2021-07-08 18:40:43, 조회 : 963, 추천 : 0 |
|
|
|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십니까?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항하중소유사[如恒河中所有沙]를 불설시사부[佛說是沙不]아
여시[如是]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설시사[如來設是沙]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일항하중소유사[如一恒河中所有沙]하야 유여시사등항하[有如是沙等恒河]어든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가 여시영위다부[如是寧爲多不]아 심다[甚多]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하사대 이소국토중소유중생[爾所國土中所有衆生]의 약간종심[若干種心]을 여래실지[如來悉地]하노니 하이고[何以故]오 여래[如來]가 설제심[設諸心]이 개위비심[皆爲非心]일새 시명위심[是名爲心]이니라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수보리[須菩提]야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며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며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항하의 모래에 대해서 여래가 말한 적이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컨데 저 하나의 항하에 있는 모래들, 그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항하가 또 있고, 그 모든 항하의 전체의 모래 수와 같은 세계가 있을 경우, 이러한 것을 참으로 많다고 하겠는가?"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들을 여래는 모두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오안에 대해 물은 다음,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세계가 얼마나 많은지 묻습니다. 제11 무위복승분에서 이미 항하의 모래 숫자에 비유하여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이 알아 듣기 쉽게 하기 위해 항하의 모래를 예로 든 경우가 많습니다. 항하의 모래 숫자처럼 많은 국토에 항하의 모래 숫자보다 많은 중생들의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루에 보통 3천 종류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을 일으키는지 헤아리기 힘들지요. 그런데 그 수많은 국토의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을 여래가 실제로 다 안다는 것입니다. 오안五眼을 통해서 치우침이 없이 똑같이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말하고, 마음을 쓰면서도 마음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근본, 실체를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지금까지 중도中道의 공식으로 해 오신 말씀을 마음에도 대비시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하루에 삼천 번 내지 삼만 번도 더 쓸 수 있는 마음을 분석해 들어가 보면 실제 하는게 아닙니다. 누구도 찾지 못하는 마음, 중생만 못 찾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도 못 찾고, 누구도 드러내 놓고 보여 줄 수가 없는게 마음입니다. 그래서 비심非心이고 시명위심是名爲心입니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입니다. 편의상 이름을 마음이라 지어서 부른다는 말입니다.
인생살이가 순전히 마음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가사의하고 요상한게 마음이지만, 마음 또한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닌, 그 이름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 더 이상 흔들리고 끄달리지 않습니다.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괴롭지 않고,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인데, 마음의 꼬투리를 하나도 찾을 길이 없다.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음 위에 건립된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 마음으로 인식하는 세계를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멜로 영화를 보면, "이 목숨 걸고 사랑했노라."고 하는데, 사랑을 찾아 보세요. 사랑이 보입니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만든 허상에 사로잡혀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분들도 많습니다.
과거심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니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현재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이 '현재의 마음이다.'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과거심이든 현재심이든 말뿐입니다. 그런데도 과거에 생각했던 마음, 행동에 연연해서 힘들어 합니다. 허망한 환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다." 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면 만사 해결이 됩니다.
이 대목 덕분에 옛날부터 많은 조사 스님들이 이야깃 거리와 법문을 많이 남겼습니다. 또한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깨달음을 성취한 분들도 많습니다.
이 대목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분이 중국 당나라 때의 덕산德山(782~865)스님입니다. 선가禪家에서 덕산방棒 임제할喝, 덕산스님은 주장자로 사정없이 사람을 두들겨 때리고, 임제스님은 할로 깨우침을 주시는 독특한 지도방법이 아주 유명합니다.
덕산스님은 본래 팔만대장경을 섭렵한 대강백으로 강의를 하는 스님이었습니다. 덕산 스님이 서촉이라는 지방에서 금강경을 강의하였습니다. 경전 중에서도 금강경은 당시 선종禪宗 사상을 대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선종은 후득지後得智, 다시 말해 수련修練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지혜를 근본지根本智라 하면, 후득지는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학자들은 천겁千劫동안 부처님의 행동거지를 배우고, 또 만겁萬劫동안 부처님의 미세한 행동을 배운 다음에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 남방南方에서는 즉심즉불卽心卽佛,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덕산스님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자기가 쓴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남방에 가서 그 마구니들을 쳐부수겠다.'는 각오를 새기면서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점심 무렵 풍지라는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노상路上에서 한노파가 떡을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떡으로 요기를 할 생각으로 "떡을 좀 팔라."하였습니다.노파가 스님의 한 짐 가득한 걸망에 눈길을 주며, "스님, 걸망 속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금강경에 대해 저술한 『금강경소초』입니다. 라는 덕산 스님에게, 노파가 말하기를, "스님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답을 하신다면 이 떡을 그냥 드리겠습니다. 만약 스님께서 답을 못하신다면 다른 곳에 가서 사 드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금강에 대해서는 박사 중에 박사였으니, '옳지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공짜로 떡을 얻어 먹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노파가 묻기를,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심 불가득이며 현재심 불가득이며 미래심불가득이라'하니,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십니까?"
노파의 질문을 받고 콱 막혔습니다. 그동안 금강경 공부를 많이 해서 『금강경소초』까지 썼는데도 이런 말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덕산스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결국 대답을 못하고 점심을 굶어야 했습니다.
당시 그 마을 노파의 실력이 그 정도였던 것입니다. 노파의 질문은 언어 문자를 떠난 것이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앞으로 외우고 뒤로 외워도 대답을 못합니다. 마음이 밝아지지 않으면, 눈[眼目]이 열리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덕산 스님의 대답이 없자, "내가 좋은 스님을 한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용담龍潭스님을 찾아가 보세요. 소문을 듣자하니, 그 스님은 뭔가 아는 것같습니다."라고 하면서 노파가 용담스님이 계시는 곳을 가르춰 주었습니다.
덕산 스님은 노파가 일러주는 대로 용담스님이 계시는 절에 찾아갔습니다. 노보살에게 한방 얻어 맞긴했어도 워낚 기개가 있는 분인지라 창피한 생각은 벌써 잊고 우레 같은 목소리로, "일찍이 용담이라는 스님의 얘기를 듣고 내가 여기에 왔는데, 물도 없고 용龍도 안 나타나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라고 고함을 치니 전 대중이 쫒아 나오고 용담스님도 나오셨습니다. 용담 스님은 "좋다! 여기에 용도 없고 못도 없지만, 진짜 용담龍潭에 잘 왔다."고 하면서 덕산 스님을 반겨 주셨습니다.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덕산에 눈에 보이는 용과 담의 뜻과 다른 말입니다. 덕산 스님이 용담스님께 인사해 보니 특별한 감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서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대단한 노파가 소개해 줄 정도로 유명한 스님이시니 혹시 뭐가 있는가 해서 밤에 또 찾아갔습니다.
야간입실夜間入室, 밤에 찾아가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서 밤이 으슥하도록 용담 스님 곁에 있었습니다. 용담 스님이 덕산 스님에게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하자, 그때서야 문門에 쳐놓은 발을 걷고 나갔습니다. 박이 캄캄해서 신발도 못 찾고 더듬더듬하다 도로 들어와서는 "밖이 어둡습니다. 신발이라도 찾을 수 있게 불을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용담스님이 초에다 불을 붙여 덕산 스님에게 주었습니다. 덕산 스님이 조심스럽게 촛불을 받자, 용담스님이 그걸 입으로 확 불어서 꺼버렸습니다. 환하던 것이 다시 깜깜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덕산 스님이 크게 깨달았습니다.
수행하던 사람이 오매불망 그리는 것이 활연대오豁然大悟입니다. 그런데 꼭 참선을 해야만 활연대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계기로 덕산 스님은 완전히 깨쳤습니다. 과일도 완전히 익으면 바람만 살짝 불어도 툭 떨어집니다. 덕산 스님은 경전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다 익어서 툭 떨어지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덕산 스님은 크게 깨달은 뒤에 용담 스님에게 예배를 하였습니다. 덕산 스님이 곧바로 들어와서 예배를 하는데 심상치 않았지요. 용담 스님이 "그대가 무엇을 봤기에 예배를 하는가?"라고 묻자, 덕산 스님이 말하기를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남방의 대선사大禪師들의 말씀을 절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다음 용담 스님이 법상法床에 올라 대중을 모아 놓고, "이 가운데 아주 쓸만한 놈이 있는데, 이빨은 칼과 같이 무섭고, 입은 벌건 피를 큰 항아리에 담아놓은 것같이 험상궂고, 기개 있는 놈이 하나 있다. 이 놈은 한 방망이로 내리쳐도 까딱도 안한다. 그러나 이놈이 하루 아침에 내 도道를 크게 세운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컷 다른 곳에서 공부하다가 문득 어느날 하룻밤 자고는 스님의 법을 이어간 것입니다. 그동안 용담 스님 밑에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법을 잇지 못하고 덕산 스님이 법을 이었습니다. 용담 스님과 덕산 스님의 만남은 후인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용담 스님의 법문이 끝났는데, 덕산 스님이 드디어 자기가 짊어지고 왔던 금강경 관련 책들을 전부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한 마디 합니다. "내가 그동안 이 세상 높고 높은 기가 막힌 도리를 이야기해 왔는데, 그런 이론들을 설사 다 안다 하더라도 털끝 하나를 하늘에다 날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한 생각 눈이 열리면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금강경 연구한 그 많은 논서가 먼지 같고 물방울 같은 것에 불과한데,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내가 바로 온 우주인데 좁은 소견으로 어리석게 살아온 삶을 반영하면서 덕산 스님은 금강경 관련 책자를 다 태워버렸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선어록 곳곳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이 대목을 예를 들어 이야기 합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깨달음 앞에는 한 방울의 물, 털끝 하나에 불과합니다. 맹인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안목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청곡 : 보현행원(이창휘) |
|
|
|
|
|
|
|
|
|
|
|
|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