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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스님 新금강경 강의-043
普德華 2021-07-12 14:43:07, 조회 : 929, 추천 : 0
금강경 제 20분, 사물도 떠나고 형상도 떠나다(離色離相分)

이세상의 모든 형색과 형상은 인연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참으로 구족한 것이 못 됩니다. 그에 따른 인식을 떠나보내야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겨울에 찌든 때를 다 닦아버려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형상과 형색도 떠나야 한다는 내용을 보면서 반성해 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형상과 형색에 매달려 살고 있는데, 겉으로
드러난 외모, 학벌, 성격 등으로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얼짱 신드롬,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사회에 내몰리는 현실, 독종이 살아남고 성공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사회에서 금강경을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 사회에 팽배한 습관에서 벗어나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일체의 형색, 형상과 그 인식이 남아 있는한 무량공덕의 반야의 삶은 펼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래의 32상이 아무리 거룩하다 하여도, 여래의 80종호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여도 여래의 설법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현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눈을 멀게 하고 구l를 멀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사대로 흩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없어져버릴 색상에 눈이 멀면 법계에 충만해 있는 여래는 보지 못합니다. 겉껍데기에 눈이 멀면 자신의 본래 면목인 반야신을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겉모습으로 부처를 보지 말라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불가이구족색신佛可以具足色身으로 견부見不아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를 불응이구족색신不應以具足色身으로 견見이니 하이고何以故오
여래如來가 설구족색신說具族色身이 즉비구족색신卽非具足色身일새 시명구족색신是名具足色身이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으로써 부처님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으로써 반드시 여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은 곧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색신[色身)은 육신, 우리 몸뚱이를 뜻합니다. 흔히 부처님을 법신, 보신, 화신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 중에서 화신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당체에서 오시어 우리의 눈앞에 사람의 모습ㅇ로 나타나 직접 부처님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32상[相]의 상은 상호[相好], 즉 생김새를 뜻합니다. 부처님은 육신도 완벽해서 경전에 구족색신[具足色身]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32상 80종호를 갖추신 부처님의 외모도 아주 잘 생기셨고 관상학적으로도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육신으로 볼 수 있겠느냐고 묻자, 수보리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부처님의 육신도 우리 중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겉모습을 보고 부처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불교는 상에 집착합니다. 불상을 조성하는 것보다 법보시가 더욱 소중한 불사인데도 전자에는 보시할지언정 후자에는 인색한 게 사실입니다. 또한 어떤 모양의 바위를 일컬어 관세음보살이 나투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퍼뜨리고, 거기에 혹해서 달려가는게 우리 불자들의 모습입니다.

금강경에 비춰볼 때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반성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밝히신, "겉모습으로 부처를 보지 말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은 본래 없엇던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무너질 것입니다. 육신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지수화풍으로 얼기설기 이루어진 이 육신은 거짓으로 존재하는 가유[假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대한 지혜와 자비, 깨달음의 가르침들을 뒷전에 두고 단지 겉모습만 보고 '부처님 부처님'한다면 정녕 부처님께서 섭섭하실, 아니 슬퍼하실 일입니다.

금강경을 공부해서 눈에 비친 모습이 다 껍데기라는 것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성숙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시내에 나올 때마다 간판을 즐겨봅니다. 간판이나 광고판만 봐도 시대상이 보입니다. 얼짱 신드롬을 증명해 주듯 요즘에 성형외과, 피부과가 성행하더군요. 너도 나도
외모를 잘 가꾸기 위해 수술도 불사하는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겉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못행겼다 해서 자꾸 위축되는 사람은 금강경 공부를 안한 사람이고, 금강경 공부를 한 사람은 외모와 상관없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연화 비구니와 외아들을 잃은 여인의 깨달음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가이구족제상 견부 불야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제상 견 하이고 여래

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는가?"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반드시 여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여러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곧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생 동안 수행하고 보시한 공덕으로 32상 80종호를 지녔습니다.

32상으로 보든 80종호로 좀 더 세분화해서 보든 외적인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부처님께서 묻자, 이번에도 수보리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외적 조건을 가지고 부처님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정신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다른 차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이어서 역시 즉비의 논리가 나옵니다. 본래 없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그 이름이 상호를 갖추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대로 얽기설기 얽힌 육신, 제아무리 빼어난 용모도 잠깐 그 모습을 연출했을 뿐 늙고 병들어 죽으면 사라집니다. 세상 만물과 마찬가지로 육신 또한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환영 같은 것이므로 그대로 공한 줄 알 때 집착이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자기, 특히 자기 몸뚱이에 대한 집착이 삶인 줄 알고 한평생 몸뚱이 봉양만 하다가 세월을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연화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빼어난지 온 나라 사람들이 그녀와 하루를 보내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연화는 문득 출가하면 착하게 살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는 부처님을 뵙고 출가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녀가 부처님께 가던 중 샘물을 만났는데, 그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도취하여, '이 아름다운 미모에 머리 깍고 스님이 될 생각을 하다니 아깝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실컷 놀다가 늙어서 출가를 생각하자'는 마음이 들어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연화를 교화하시기 위해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변화로 만들어내어 서로 만나게 하였습니다. 연화는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고운 여인을 보고 황홀해졌습니다. 연화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마음이 통한 두 여인은 이런저런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여인이 졸리다며 연화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눈을 감자마자 숨이 끊어지고, 잠깐 사이에 시체가 썩어 그 아름다운 모습이 흉측하게 변하였습니다. 연화는 이 모습을 보면서 삶의 무상無常을 절감하고 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출가 후 연화 비구니는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에 사랑스러운 외아들을 잃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외아들의 죽음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아들을 안고서 동네사람들에게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녀는 부처님께도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내가 네아들을 살릴 약을 주겠다. 우리 마을에 가서 겨자씨를 받아 오너라. 단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집의 씨앗이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부처님의 말씀에 아들을 살릴 수 잇다는 희망을 가지고 집집마다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없는 집,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은 단 한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여인은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늘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수행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찰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여 괴로워하고 가슴 아프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대부분 현재의 모습이 무너지고 나서야 인연의 도리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닥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모습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교에 입문하여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삶의 실상을 깨닫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을 함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이 상하면 마음까지 힘들어 집니다. 육신을 건강하게 돌보고 아름답게 가꾸되 다만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상과 본체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세가 성숙한 불자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교리로 말하면, "차별이 평등에 걸리지 않고, 평등이 차별에 걸리지 않는다." "항포가 원융에 걸리지 않고 원융이 항포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낱낱이 구별되고 차별되는 항포의 세계와 남녀노소, 승속, 성인과 범부를 다 초월한 원융의 세계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강조하니 육신을 도외시하는 불자들이 많은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현실을 수용하면서 그 너머의 실상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질에 잇어서 마음만이 불생불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도 다 불생불멸입니다.

그리하여 금강경의 가르침을 뼛속까지 배어들게 해야 합니다. 무상무상을 제대로 알면 자식이 죽은 아픔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고통과 고난이 닥쳐도 가볍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칭찬을 듣거나 비난을 받거나 흔들리지 않고 여유 있게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신청곡 : 부모은중 노래(김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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