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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스님 新금강경 강의-044
普德華 2021-07-15 09:04:47, 조회 : 956, 추천 : 0
금강경 제21분. 말도 말할 것도 없다(非說所說分)

불교에서 주객이란 말 대신에 능과 소라는 말을 잘 씁니다. 여기에서 설은 能說(능설), 所說(소설)은 설할 거리, 설할 대상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능설은 주체적인 입장에서 설하는 것이고, 소설을 객관적으로 설해져야 할 법과 대상을 말하는데, 금강경을 강의하는 입장인 저는 능설이 되고, 금강경과 제 강의를 듣는 여러분은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래는 능히 설하는 분이기도 하고 설할 법이 있는 분인데, 그것은 수보리의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여래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설법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我(아)도 없고, 설명할 대상이 있는 차원에서 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설소설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또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 경전 말씀에 귀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설하신 법이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요, 부처님의 말씀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부처님께서는 49년동안 많은 설법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고, 크게 깨달은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도 고정되게 '이것이다'라고 할 것이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도대체 부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의혹을 가질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설법이란 깨달은 사람이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하신 말씀을 뜻합니다. 설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이 부처님과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금강 반야는 사람들
모두가 본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법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여래가 설법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곧 여래를 비방하는 일이고, 여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반야의 도리는 학문과 지식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배우고 가르쳐서 될 일도 아닙니다. 가르칠 부처도 없고 배울 중생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야, 중생이란 본래로 중생이 아니다. 그 이름이 중생이며 그냥 중생이라고 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여물위여래汝勿謂如來가 작시념作是念호대 아당유소설법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막작시념莫作是念이니 하이고何以故오 약인若人이 언여래言如來가 유소설법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彿이며 불능해아소설고不能解我所說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설법자說法者는 무법가설無法可說을 시명설법 是名 說法이나라.

"수보리야, 그대는 이러한 말을 하지 말라. '여래는 스스로<나는 반드시 설법한 것이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지 말라. 그런 생각도 하지말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설법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며, 내가 말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설법한다는 것은 설할 수 있는 법이 없고, 그 이름이 설법일 뿐이니라."

지금까지 미진, 세계, 깨달음, 중생, 부처님의 32상 80종호 등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아주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즉비의 원리, 즉비의 이치로 깨뜨려버렸습니다. 파이집 破二執,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깨고 다시 새로운 삶을 펼치자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법은 없는 것이고 이름이 설법이라고 했습니다. 금강경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표현입니다만, 설법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 성현이 자신의 주옥같은 설법을 어떻게 깨뜨리고 모든 사람이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자기 말을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무조건 따르라고 하지 부처님처럼 말씀하신 성현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조차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 세상 그대로 평화입니다.


1분간 부처 흉내 내면 1분간 부처

이시爾時에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가 백불언白佛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파유중생頗有衆生이 어미래세於未來世에 문설시법聞說是法하고 생신심부生信心不잇가
불언佛言하사대 수보리須菩提야 피비중생彼非衆生이며 비불중생非不衆生이니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중생중생자衆生衆生者는 여래如來가 설비중생說非衆生일새 시명중생是名衆生이니라

그때 지혜를 생명으로 삼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은 중생들이 이 다음 세상에 이러한 도리를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믿는 마음이 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 하는 것도 여래는 말하기를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그동안 수보리를 장로라고 표현하다가 여기에서는 혜명 수보리
라고 하였습니다. 혜명慧命(ayusmant)은 지혜를 생명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혜명 수보리라고 한 까닭이 있습니다. 수보리는 공空의 도리를 잘 이해하는 해공제일일 뿐만 아니라 미래세에 남다른 식견이 있는 지혜제일이기 때문입니다.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설법이 곧 설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설법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누가 신심을 내겠느냐고 여쭙는 대목입니다. 사실 잘못 적용하면 큰일 날 말이기 때문에 수보리가 그렇게 여쭌 것입니다. 설법을 부처님께 적용해서 “부처님도 부처님이 아니라 이름이 부처님이지.”라고 하면서 부처님께 불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보리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답하신 것은 “그래 맞아,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니므로 진짜 부처님이야, 설법은 설법이 아니므로 진짜 설법이야.”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질문을 받고, 그들은 중생이 아니라고 합니다. 편의상 이름을 붙여서 중생이라 할 뿐이지 중생도 아니고 중생아님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입니다.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아프리카에서 미국 땅에 끌려온 노예로서 짐승취급을 받던 흑인이 미국의 최고 지도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에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중생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는 그들도 부처라는 뜻이 있습니다. 뛰어난 여성을 보고 ‘그 사람 여자 아니야, 여장부야’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여자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렇듯이 중생이 아니면서 중생 아닌 것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한 말입니다. 말은 조금 다르지만, 설비중생을 즉비중생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 대목에 과거에 깨달으신 조사스님들이 주석을 달기를, “모두 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인 것을, 그래서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라고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금강경을 폭넓게 공부하기로 하면 예부터 뛰어난 주석서를 보는 게 좋습니다.

앞에서는 설법의 문제를 이야기했고 여기에서는 중생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생을 즉비의 논리에 등장시켜보았는데, 이것을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고정시켜버리면 그 테두리 안, 틀에 갇히게 됩니다. 특히 자녀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집안에 태어나 이렇게밖에 못 배웠어, 나는 팔자가 이래.” 하면서 스수로 규정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요즘은 어릴 때 한 번 지으면 평생 그 이름을 가지고 가지만, 옛날에는 어릴 때 부르던 이름과 호적 이름이 다른 사람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예명, 필명, 당호 등 이름을 많이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이름이 50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중생이라는 것도 이름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은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런데 부처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욕심을 부리면 아귀도 되었다가 분노를 못 이기면 순식간에 아수라가 됩니다. 또 마음을 잘쓰면 부처 노릇, 보살 노릇도 곧잘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편의상 잠깐 부르는 이름에 목매달고 집착하고 고정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불자들과 대화할 때, “그것은 스님들이나 할 일이지 우리 속인
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말을 들은 적이 많습니다. “우리 속인이, 중생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비하시켜 놓고는“중생이니 이럴수밖에 없다.”고 하는 중생상을 알른 떨쳐버려야 부처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제가 인불사상人佛思想(사람이부처님)과 일행일불사상一行一佛思想(한 가지 부처의 행을 할 때 그동안만큼은 부처)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1분 동안 부처의 흉내를 내면 1분 동안 부처입니다. 부처행, 보살행을 자주 반복해서 하다 보면 자기 자신 안에 본래 갖춘 불성이 드러납니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 하는 것도 여래는 말하기를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니라.”

인류 역사상 위와 같은 부처님 말씀처럼 인간에게 희망과 용기,
자신감을 한껏 불어넣어 주는 말씀도 없습니다. 참으로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라고 하는 법문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중생의 틀을 과감히 깰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 배우자, 자녀, 이웃에 대한 틀, 고정관념을 깨면 다르게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나의 시각, 나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대상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이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시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색안경을 벗고, 그대로 투명하게 모든 대상과 존재를 부처로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신청곡 : 내 마음의 부처(유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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