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방송게시판
|
|
|
|
![]()
|
|
2021-07-23 16:27:10, 조회 : 1,010, 추천 : 0 |
|
|
|
금강경 제27분,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無斷無滅分)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일체 상이 끊어져서 텅 비었으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단멸 또한 아닙니다. 집착하기 좋아하는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거기에 메달립니다. 그래서 말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이 27분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에서는 그러한 착각과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단도 없고 멸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단[斷]은 시간적으로 끊어졌다는 표현인데.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으면 인생이 끊어졌다는 뜻에서 끊을 단자를 씁니다.
그런데 무단[無斷]이라 하였습니다. 얼핏 끊어진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멸[滅]은 공간적으로 눈에 보이던 것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부처님게서는 깨달음을 설하실 때 공의 이치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반야부 600권이 전부 공의 이치를 설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한 것, 텅 비어 없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시간적 * 공간적으로도 소멸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달음의 경지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볼 수 있듯 단멸이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뚯으로 오히려 모든 현상이 그대로 여실하게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화장을 하거나 땅에 묻었을 때, 혹은 작은 종이 한 장을 불에 태웠을 때 없어진 것 같지만 공간적으로 결코 없어진 게 아닙니다. 단지 형태만 변화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영원히 있는 것으로 알아도 안 되고, 전혀 없는 것으로 알아도 안 되고, 시간적으로나 공각적으로 아예 없다고 이해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고정 불변하는 어떤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이해해도 안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있다는 말과 없지 않다는 말은 다릅니다. 없지 않다는 말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있는 것을 한 번 부정한 것이 단멸이고, 거기에서 한 번 더 부정하면 없는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산은 산이라는 말은 그대로 있다는 뜻이고,또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말은 단멸이라는 뜻이 됩니다. 절대부정을 거쳐서 다시 설대긍정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단멸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산은 다만 산일 뿐이고 물은 다만 물일 뿐입니다. 처음의 긍정에서 다시 부정으로, 부정에서 다시 긍정으로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실상대로, 사실대로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눈에 섣부른 판단을 하면 안 됩니다. 그 고비를 한 번 넘겨서 부정할 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정으로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단무멸입니다. 부정을 거친 뒤 새로운 긍정을 하는데, 처음에 봤을 때의 긍정과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사람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처음에 본 것과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봤을 때 다릅니다.
'그 사람 그런 면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나. 맨 처음 봤던 것은 더욱 아니구나'라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존재의 공성[空性]이나 무[無]의 철학이 상당히 고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인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중도로 표현 됩니다.
긍정과 부정을 거친 뒤에 다시 긍정의 차원으로 돌아섰을 때, 그것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면서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을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 불교의 궁극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 절대 긍정으로 나아갈 때 조화로운 삶이 펼쳐진다
수보리須菩提야
수보리야
여약작시념汝若作是念호대 여래如來가 불이구족상고不以具足相故로 그대가 혹 생각하기를 '여래는 잘 갖추어진 상호를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아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지 않는가?
수보리須菩提야
수보리야
막작시념寞作是念하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如來가 불이구족상고不以具足相故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하라
'여래는 잘 갖춰진 산호를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지 말라.
앞에서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32상 80종호를 다 갖춘외적인 모습으로부처님을 볼 수 있느냐고 묻고 그건 아니라는 대답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렇게 부정하는 것을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구족具足한 상을 쓰지 않는 것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구족색신具足色身과 구족제상具足諸相이라는 구절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다 같은 뜻으로 여러가지 상相을 결함 없이 온전하게 갖춘 것을 뜻합니다. "여래는 잘 갖춰진 상호를 마음에 두지 않났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 육신, 즉 외적인 현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다시 말해 부정에서 절대 긍정으로 나아갔을 때 조화로운 삶아 펼쳐지고, 깨달음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실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울앞에 섰을 때 나 아닌 다른 모습이 비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울에 비친 나와 실체의 내가 둘이 아닙니다.큰물이든 작은 물결이든 물이라는 성질에서 보면 동일합니다. 여래의 입장에서 볼 때도 구족한 상호相好와 진실한 여래가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상에 매달리지 않고 툭 트인 마음으로 활달한 인생을 살아야겠지만 '꼭 상이 없어야 된다.'는 생각만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들이 부대끼면서 매순간 만나는 모든 현상에서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상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저함이 없이 깨달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치우치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함께 공존하여서 완전한 손이 되듯이 부정과 긍정, 있음과 없음이 조화롭게 균형을 잡아갔을 때 좋은 가정, 좋은 사회, 좋은 관계가 됩니다. 우리 사회, 우리 가정, 우리 자신이 그렇게 존재하고, 부처님의 깨달음도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는 너무 높은 경지라서 우리와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깨달음을 내 인생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염세주의는 불교가 아니다.
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하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說諸法斷滅(설제법단멸)가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
하이고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於法(어법)에 佛說斷滅相(불설단멸상)이니라
수보리야, 그대가 만약 생각하기를,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것이 아주 없다고 말한다'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것이 아주 없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지금까지는 금강경에서 계속 破相(파상), 상을 깨뜨리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있다'는 데에 떨어지지 말라고 하니 이제는 '없다'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문제를 조화시키기 위해 斷滅(단멸)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최상의 깨달음에 마음을 일으킨 사람들은 모든 존재의 없는 상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완전히 없는 것만 이야기 하는가?" 라고 물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無斷無滅分(무단무멸분)에서 꼭 유의해야 할 점이 바로 없다는 데 치우쳐서도 안되고, 있다는데 치우쳐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단멸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부정하는 것이지 궁극적인 부정은 아닙니다.
그래서 단멸상을 설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조금 한 사람들이 잘 걸리는 병이 있습니다. "무상하다. 일체가 공하다. 無(무)다. 마음이 부처다."하여 외형적인 것을 일체 무시합니다. 또한 마음만 운운하면서 인생살이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잘 살던 사람이 공연히 허무감이나 무상감에 젖어 피폐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불교를 만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현실에 눈이 어두운 물질주의자로 탐.진.치 삼독에 젖어 사는 것도 문제지만, 현실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염세주의자는 불자가 아닙니다. 불교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한 번 죽고 나면 그만이다'하는 단멸상이나 '천당에서 영원히 산다'는 常見(상견)을 정견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와 교화활동이 둘 다 중요하듯이 우리들의 마음공부와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참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無記空(무기공)에 빠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얼핏 생각하면 천당에 머무르는 것은 행복할 것 같지만 그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복을 다 쓰고 나면 열악한 세상에 떨어질 수도 있고, 더 큰 문제는 무기력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력을 세워 열심히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활짝 펼쳐야 합니다.
신청곡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우성스님) |
|
|
|
|
|
|
|
|
|
|
|
|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