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방송게시판
|
|
|
|
![]()
|
|
2021-07-26 15:28:51, 조회 : 996, 추천 : 0 |
|
|
|
금강경 제28분, 누리지 않고 탐하지 않는다(不受不貪分)
보살은 복덕을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습니다.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 자연히 복덕이 따르고 무상보리가 따릅니다. 진리도 깨닫게 됩니다. 진리를 깨달음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아집我執을 떠나보내면 일체 만물에서 참 여래를 봅니다. 그래서 일체 법에 아我가 없음을 깨달은 지혜의 공덕은 그 어떠한 물질적인 보시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진리를 깨달았으나 정이 남아 있어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전해주는 보살은 무상無相이며 무아無我입니다. 복덕을 구하거나 탐하지 않습니다. 반야의 삶을 사는 보살이 무슨 복덕을 바라며 무슨 보리를 바라겠습니까? 바라지 않으니 달리 받을 리도 없습니다. 그렇듯 일체법이 텅 비어 아我가 없으니, 그저 무심히 체득하여 실천할 뿐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구하지 않고 얻는 것이고, 탐하지 않아도 갖추게 됩니다. 주어서 받고 탐해서 얻는 것이 별것이 있겠습니까. 사람 사람이 본애로 산 있고 물 있는 곳에 영화도 없고 욕됨도 없는 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수보리須菩提야 약보살若菩薩이 이만항하사등세계칠보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지용보시持用布施하고 약부유인若復有人이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하야 득성어인得成於忍하면 차보살此菩薩이 승전보살勝前菩薩의 소득공덕所得功德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찬 금은보화로써 널리 보시한 이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존재의 무아無我의 도리를 알아서 그 숨은 이치를 깨달으면 이 보살이 얻는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수많은 물질적인 보시보다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숨은 이치를 깨닫는 공덕이 훨씬 크다는 얘기입니다. 이론적으로라도 일체법무아에 대해 확실히 이해해야 됩니다. 일체법무아는 고정 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법은 모든 사물과 사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해가 뜨고 지는 것,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것도 사건입니다. 사람이 만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사건입니다. 밥을 먹고 배설하는 것도 사건입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든 사실, 사건이 법입니다. 사물도 역시 법에 들어갑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 모든 것에 고정 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이치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도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불교에서는 영원한 것의 대명사인 다이아몬드도 변한다고 합니다. 우리 안목으로 볼 때는 아주 느리게 변하니까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한한 세월을 놓고 볼 때는 다이아몬드도 변합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참을 인忍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생법인 無生法忍, 생사가 없는 진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 진리를 인자로 표현할까요? 진리, 일체무아라는 사실, 진실은 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아는 것입니다. 컵은 컵대로, 연필은 연필대로, 카메라는 카메라대로, 우리 육신은 육신대로, 내 마음은 마음대로 생멸 변화하는 것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들어 있습니다.
무생인無生忍, 생사가 없는, 생멸이 없는 이치도 틀림없이 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자를 씁니다. 참는다는 것은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참고 있으면 기쁜지 슬픈지 아픈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한 바닷물이 짜지만 짠맛은 안 보입니다. 물만 봐서는 바닷물인지 민물인지 분별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짠맛은 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예를 들면, 단청의 물감을 만들 때 아교를 씁니다. 하지만 아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인忍입니다.
이와 같이 공성, 진리, 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 사람은 환히 압니다. 바닷물을 다루는 사람은 짠맛을 잘 알고, 단청장丹靑匠은 물감속에 아교가 들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잘 알면 활용도 잘합니다.
깨달은 사람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본 진리의 내용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진리를 인자로 표현합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보시한 것보다 진리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불법을 가슴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설사 이렇게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지닌 알량한 물질보다 불법이 소중하다는 것만 이해하더라도 불법의 가치를 상당히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볼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가치 있는 것을 언제쯤 깨닫게 될 것인지 과제로 삼고, 늘 반성해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과연 불법에 얼마만한 가치를 두고 사는가? 말로는 불법운운 하면서 평소 아끼는 것을 불법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청곡 : 지난 일을 참회하며(오무산) |
|
|
|
|
|
|
|
|
|
|
|
|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