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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4 11:15:28, 조회 : 977,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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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제 32분. 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 응.화신은 진신이 아니다.
부처님은 크게 法身(법신).報身(보신).化身(화신)의 세 가지 몸으로 봅니다. 여래 10호라고 하여 열 가지 이름으로 부처님을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의 달은 법신을 뜻하고, 달빛은 보름달이냐 초승달이냐에 따라 광도가 다른데 그것을 보신, 공덕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應化身(응화신)의 신은 몸 신자이고 응자는 중생에게 맞춘다, 응해 줄 응자입니다. 응화신은 중생에게 맞춰 교화하는 부처님입니다. 역사적으로 등장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흔히 응신.화신이라 합니다. 千江流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있다는 것으로 부처님의 응화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마음, 활발한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걸림 없는 능력을 부처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 부처님처럼 환하게 밝은 달은 아닙니다. 중생업을 지었기에 중생답게 살고, 사람업을 지었기에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망나니처럼 산다고 해서 본래 갖춰진 부처자리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는 모습, 조작된 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부처자리가 진짜입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편 부처님의 위덕, 영향력을 표현할 때 喩如千日出(유여천일출),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것이 공덕의 몸, 보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수행력과 덕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차원은 같지만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믐달이 되면 캄캄해서 신도 못 찾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초닷새, 초엿새가 되면 희끄므레 밝아져서 어지간한 길은 찾아갈 수 있고, 보름달이 되면 산중에서는 글도 읽습니다. 저도 학인시절 달빛 아래에서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에 지금은 夜警(야경)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만, 제가 공부할 때만 해도 학인들이 순번을 돌아가며 야경을 했습니다. 학인시절, 휘영청 밝은 달빛이 아까워 도량을 돌면서 경전을 읽었습니다. 목판영인본은 활자가 커서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분은 천개아 달이 뜬 것과 같이 밝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달이 구름에 숨으면 천 개의 달도 따라서 사라지고, 부처님이 교화를 거두면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라고 합니다. 금강경의 마지막 32분, '응화신이 진신이 아니다'라고 이름 짓고 상을 떠나야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아울러 금강경 공덕에 대해 강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불법에 마음을 낸 사람들은 반드시 이 금강경을 읽고, 남을 위해서 해설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경을 전부 하기 힘들면 사구게만이라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 일러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복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좋은 일을 해서 지은 복보다도 천배, 만배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 일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상에 집착하지 말라. 모양다리를 취하지 말라. 너다 나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남자다 여자다, 선이다 악이다,
중생이다 부처다,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따위의 분별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상의 참모습은 그와 같은 차별상이 아닙니다.
사람의 본래면목은 생김새, 알음알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습관적으로 그와 같은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마지막 결론부분에 이르렀으면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참모습, 본래의 모습으로 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일입니다.
여여부동하며 무상한 것,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반야의 삶이며 여래의 삶입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약유인若有人이 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지용보시持用布施하고 약유선남자선여인
若有善男子善女人이 발보살심자發菩薩心者가 지어차경持於此經하야 내지사구게등乃至四句偈等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야 위인
연설爲人演說하면 基福이 승피勝彼하리니 운하위인연설云何爲人演說고 불취어상不取於相하야 여여부동如如不動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금은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 이가 있고, 만약 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경전을가지고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서 설명하여준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ㅇㅟ하여 설명하여 주는 것’인가? 상相에 끌려 다니지 않고 여여如如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니라.
대승불교의 특징은 보살행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평생 동안 보살행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깨달음이라는 재산을 가지고 대시주자가 되어서 가는 곳마다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반열반에 드시기 직전까지도 나눠주는 보살행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는 보살 사상, 보살 정신, 보살행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가 금강경이 우리의 고질적인 상병을 고치는데는 뛰어난 처방임은 분명하지만, 모든 경전을 대표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자기만 이롭게 한다 하여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를 사정없이 매도해 버립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금강경은 2% 부족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금강경 결론 부분에서 ‘보살의 마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지혜가 높고 깨달음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보살의 마음이 없으면 부처님의 바른 제자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수행력이 높고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안타까워하고 깨우쳐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도 그 점을 강조하여 보살의 마음으로 금강경이나 사구게만이라도 잘 간직하고 외우고 쓰고 남을 위해서 전해주면 그 복이 세상에 가득 찬 금은보화를 보시한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바로 연이어서 부처님께서 자문자답하신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주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셨지요? 그저 막연히 법회 장소에 인도하는 것, 수많은 법회,포교활동이 위인연설이라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비수와 같은 질문과 답을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상相에 끌려 다니지 않고 여여如如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니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평소 알고 있던 설법 포교연설에 대한 안목이 완전히 깨지셨습니까?
이 말씀은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에 끌려 삽니다. 금세 변하고 말 것에 집착하여 번뇌망상을 지어냅니다. 그런데 의심이 들 것입니다. ‘나쁜 일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이해하지만, 신나고 좋은 일에 대해서는 좀 집착해도 되지 않을까, 동기 유발이 될 수도 있을텐데’하고 말입니다. 또한 보시한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생색을 낸다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상에 머물면 병통이 생깁니다. 상을 낸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 나를 분별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고도 상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면 됩니다. 조그만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 됩니다. 적당한 예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느 사찰에 주지스님이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서 영접할 정도로 큰 불사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절에 오면 늘 주지실로 직행하고, 공양 상도 따로 주지실에서 받을 정도로 대접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절에는 간혹 그렇게 특별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주 좀 받아서 불사를 했는데 어떻게나 생색을 내는지 다시 기둥 뽑아가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을 스님들에게 가끔 들을 정도로 무주상보시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불사를 한 사람이 늘 후원에서 대중과 함께 일하고 공양하고 법문을 듣습니다. 대중들도 그 사람이 시주를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 전혀 모릅니다. 불취어상 여여부동입니다. 그 사람은 행동으로 이미 큰 설법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말로써 설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줍니다.그게 진정한 위인연설입니다. 상을 내지 않는 여여부동한 모습의 삶이야말로 진짜 설법하는 사람이요, 설법의 실체며 설법의 진면목입니다. 100%안자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늘 이 대목을 이렇게 이해하고 스스로 감동합니다.
아무리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자기 혼자 묵묵히 일고 있었는데, 들은 사람은 온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충격과 깨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금강경 한 구절이 육조 혜능 대사와 같은 위대한 성인을 탄생시킨 일이 있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 같은 경우 일자무식의 나무꾼 총각이 우연히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나뭇짐 지고 다니다가 다이아몬드 한 짐, 금강경을 짊어지고 온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진정한 위인연설입니다.
금강경을 제대로 공부하기만 하면 나무 한 짐 같았던 우리 인생을 다이아몬드 한 짐같이 이냉으로 바꾸어놓을 수도 있습니다.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구만큼 큰 다이아몬드보다 금강경이 휠씬 더 가치가 있다고 했어도 도대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지 결코 금강경이나 부처님 문제가 아닙니다. 예컨대 태양은 아주 밝은데 맹인은 어둡다고 합니다. 그게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맹인의 허물이지 태양의 허물은 아닙니다. 금강경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청곡 : 금강경 사구게-최봉종 & 신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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