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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2일(월) 아침방송법문 :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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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2 06:47:26, 조회 : 489,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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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70년 1월 12일(월요일)
무창포불교대학 불심사 아침방송
주제 :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
법우 여러분, 관음재일 아침에 우리가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라는 주제로 법문을 나누는 이유는 관세음보살님을 신앙의 대상으로만 모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보살의 삶의 방식과 마음의 태도를 오늘 우리의 하루 속에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면 많은 분들이 먼저 기도와 염불을 떠올립니다. 물론 기도와 염불은 관음신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말씀하신 관세음보살의 가장 큰 특징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중생의 부르는 소리를 듣는 마음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 자체가 세상의 소리를 관(觀)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소리란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고통, 마음속에서 울리는 신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까지 모두 포함한 소리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그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먼저 듣는 분이십니다.
이 점에서 관세음보살의 삶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고통의 소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소리가 울리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산다는 것은 그 모든 소리를 다 해결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한 번 더 듣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 한 번 더 듣는 마음이 바로 자비의 시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연약함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비는 가장 큰 용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보는 일은 피하고 싶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나까지 괴로워질 것 같아 외면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고통을 바라보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길어질 때, 하소연이 반복될 때, 같은 이야기를 계속할 때 우리는 쉽게 지치고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는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라는 생각이 먼저 올라옵니다.
바로 그 지점이 수행의 자리입니다. 그때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며 잠시 마음을 멈출 수 있다면, “지금 이 사람은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서 이 말을 하고 있을까”라고 한 번만 더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관세음보살의 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마음을 닫지 않는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 바로 답을 주려 하지 않고 잠시 함께 머물러 주는 것,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관세음보살의 삶을 닮아가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다른 이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처럼 여길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바른 길에 들어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완벽한 자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관음재일인 오늘 하루만이라도, 세상의 소리를 조금 더 듣는 방향으로 마음을 쓰자는 것입니다. 남을 바꾸려 하기보다 먼저 듣고,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 보자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란, 고통을 없애는 하루가 아니라 고통을 혼자 두지 않는 하루입니다. 이 마음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다른 결을 갖게 됩니다.
법우 여러분,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듣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그 듣는 마음이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듣는 마음이 없다면 말은 쉽게 거칠어지고, 자비 없는 말은 어느새 칼이 되어 상대의 마음을 베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의 업을 매우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몸으로 짓는 업보다 말로 짓는 업이 더 오래 남고, 마음으로 짓는 업보다 말로 짓는 업이 더 많은 상처를 남긴다고 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삶은 그래서 말을 아끼는 삶이며,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삶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하루가 아니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할 수 있는 하루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바로 반박하지 않고, 상대의 말 뒤에 숨은 감정을 먼저 헤아려 보는 태도가 바로 자비의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족에게 하는 말, 동료에게 하는 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남에게는 부드럽게 말하려 애쓰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을 던지며 살아갑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타인을 향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지쳤을 때 “왜 이것밖에 못 하느냐”고 다그치기보다 “그동안 많이 애썼다”고 말해 줄 수 있는 마음 또한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남에게만 베푸는 덕목으로 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 마음, 자신을 돌볼 줄 아는 마음 역시 자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해질 때, 그 수행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관음재일에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염불은 어떤 힘을 밖에서 끌어오는 행위가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내 안에서 깨우는 수행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듣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함께 머무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염불은 호흡과 닮아 있습니다. 급하게 부르지 않아도 되고, 크고 요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호흡에 한 번, 마음이 흩어질 때마다 조용히 부르며 다시 돌아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침방송을 듣는 이 시간 또한 작은 관음 수행의 시간입니다. 법문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보다, 법문 한 구절이 하루 중 문득 떠올라 말 한마디를 삼키게 할 때, 그때 자비는 실제 삶이 됩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 종일 자비로운 마음을 유지하겠다는 다짐이 아닙니다. 그런 다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다만 하루에 몇 번이라도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시 세우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판단하기 전에 한 번, 짜증이 올라올 때 한 번, “지금 관세음보살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묻는 그 순간이 바로 수행의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성취를 묻는 제자에게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을 얼마나 자주 알아차릴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번뇌가 없는 삶이 아니라, 번뇌를 놓치지 않는 삶이 수행자의 삶입니다.
관음재일은 바로 이 알아차림을 새롭게 다짐하는 날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더 크게 듣기보다, 마음의 소리를 더 정확히 듣는 날이며, 남의 고통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을 세우는 날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는 그래서 특별한 날이 아니라 평범한 날이어야 합니다. 출근길에서, 가정에서, 전화 한 통 속에서, 침묵이 필요한 순간에서 자비가 살아나야 합니다.
법우 여러분, 이제 오늘 관음재일 아침방송 법문의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라는 이 주제는 오늘 하루를 잘 살아보자는 다짐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삶 전체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고통을 없애는 삶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통해 보여주신 관세음보살의 모습은,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중생의 부르는 소리에 먼저 응답하는 자비의 실천자입니다.
이 점에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모든 고통을 없앨 수는 없고,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고, 그 문제 앞에서 마음을 닫지 않는 선택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태도를 선택하겠다는 서원입니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외면하지 않겠다는 태도, 판단보다 이해를 먼저 하겠다는 태도, 말보다 마음을 먼저 내겠다는 태도가 바로 관세음보살의 삶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깊이를 묻는 질문에 “얼마나 오래 수행했는가”보다 “얼마나 자주 자비로 돌아오는가”를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는 한 번의 결심으로 완성되지 않고, 수없이 돌아오는 반복 속에서 익어갑니다.
오늘 관음재일에 우리가 올린 기도와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소리는 입에서 시작되지만, 그 소리가 머무는 자리는 마음입니다. 염불이 끝난 뒤에도 그 마음이 하루의 말과 행동 속에 남아 있다면, 그날은 이미 관음 수행의 하루가 됩니다.
법우 여러분, 우리는 종종 “나는 아직 자비롭지 못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완성된 자비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비로 향하는 방향을 잃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방향이 바르다면 걸음이 느려도 결국 그 길 위에 서 있게 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관세음보살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를 하기 전에 한 번, 짜증이 올라올 때 한 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한 번, “지금 이 순간 관세음보살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계실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물음 하나가 마음을 멈추게 하고, 그 멈춤이 다시 자비로 이어집니다. 자비는 갑자기 생기지 않지만, 멈춤이 쌓이면 반드시 자라납니다.
관음재일은 음력으로 매달 스무 나흘 날 한번 씩, 일 년에 열두 번 돌아오는 날이지만, 관세음보살의 삶은 하루하루 이어져야 할 수행입니다. 오늘의 관음재일이 지나도, 이 아침방송이 끝난 뒤에도, 법우 여러분의 삶 속에서 관세음보살의 귀와 마음이 살아 움직이기를 발원합니다.
이 모든 법문의 공덕을 오늘 아침방송을 함께한 모든 법우님들과 그 가정, 불심사와 인연 맺은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며, 고통이 있는 곳마다 자비가 먼저 닿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하루가 모여 관세음보살처럼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서원하며, 이로써 관음재일 아침방송 법문을 마무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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