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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의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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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0 13:36:48, 조회 : 1,928,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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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1240120275.jpg (230kb) 다운 :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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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2003년 4월 19일(일) 법정 스님이 대중법회가 열린 서울 성북구 길상사 경내에서 수천명의 사부대중이 화려하게 피어난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꽃' 아래에서 법정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다.
눈부신 봄날입니다.
오늘 이런 자리(법석)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회가 우리 생애에서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가 있을 때마다 늘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자리를 비울 때가 올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길상사에 연등이 너무 많이 걸려 꽃과 나뭇잎을 가리고 있지만, 꽃은 저마다 자신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습니다. 나뭇잎들도 처음 피어날 때는 자기만의 독특한 빛깔을 맘껏 드러내 펼쳐 보입니다. 가지 마다 새롭게 돋아나는 잎의 독특한 빛은 눈을 부시게 합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서 봄이 옵니다. 보통 봄이 와서 꽃이 핀다고 생각하지만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입니다. 꽃이 없는 봄, 우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대자연에서 꽃이 피지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침묵의 봄’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의 책도 나왔지만 침묵의 봄은 요즘처럼 사람들이 ‘과소비’로 치닫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오게 됩니다. 봄인데도 벌써 초여름의 날씨가 오고, 늦은 봄까지 눈이 내립니다. 예상할 수 없는 이상 기온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다 우리 인간의 욕심이 만든 결과입니다.
꽃은 우연히 피지 않습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그 배후에 인고의 세월이 있습니다. 추위와 거친 바람들을 견뎌온 나무와 풀만이 시절인연을 만났을 때 그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잎은 돋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꽃과 잎만이 계절을 만나서 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자만이 자기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신의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노력을 하셨습니까.
저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 것이지만, 매화는 반쯤 피었을 때 아름답습니다.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좋고,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제격입니다. 배꽃은 가까이 보아야 좋습니다. 매화가 만개하면 여백의 운치를 느낄 수 없습니다. 벚꽃은 만개해야 여한이 없습니다. 반쯤 핀 벚꽃의 아름다움은 덜합니다. 복사꽃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본질적인 요소가 드러나 본질이 가려집니다. 그러므로 복사꽃은 멀리서 보아야 분홍빛 환상적의 빛깔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배곷은 가까이 보아야 그 맑음과 뚜렷한 윤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같은 견해는 인간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두고 그리워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무릎을 맞대고 앉아 회포를 풀어야 좋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우정이라도 늘 가까이 있으면 시들해지기 쉽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참고 기다릴 줄 모릅니다. 뭐든 즉석에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요즈음 높은 산 낮은 산을 가리지 않고 산에는 산벚꽃이 장관입니다. 늦은 봄에 젖어든 이 계절에 온 국토에 산벚꽃이 만개했습니다. 우리는 이 산벚꽃을 보며 나무의 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지혜를 생각하면 고개가 숙여집니다.
알다시피 식물은 나서 죽을 때까지 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옮겨다닐 수가 없으므로 꽃과 씨앗으로써 자기의 공간을 넓힙니다. 산벚꽃은 사람의 손이 간 것이 아니고 자연이 스스로 이뤄낸 조화입니다. 산벚꽃들은 새와 벌을 불러들여 버찌를 만들고 새가 이를 쪼아 먹고 소화되지 않는 씨앗을 떨어뜨려 여기서 싹이 틉니다. 이 씨앗으로 인해 산벚나무가 자라고 시절인연이 성숙되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여기에 자연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늘 습관처럼 외우는 경전이 천수경(千手經)입니다. 천수경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그 뜻을 모르고 외운다면 소용이 덜합니다. 천수경 내용중에 ‘도량찬(道場讚)’이 있습니다. 도량청정무하예 삼보천룡강차지(道場淸淨無瑕穢 三寶天龍降此地)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청정한 도량에는 늘 도량신이 상주한다는 뜻입니다. 절에는 어느 절이든 도량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미신이 아닙니다. 이 도량신들이 낱낱이 도량에 살거나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심 깊은 사람은 도량신이 먼저 알아봅니다. 신심이 깊은 분은 도량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가호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량에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도량신이 먼저 알아보고 거부합니다. 필요한 존재는 그것이 사람이든 초목이든 다 받아들입니다. 그동안 반세기 남짓 도량의 은혜로 살아온 제 자신의 체험입니다.
승가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이 청정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청정성은 진실성이기도 합니다. 승가의 생명은 청정과 진실성에 있습니다.
길상사를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에 의문이 듭니다. 정말 그런가. 맑고 향기롭게 개선되고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맑음은 개인의 수행을 통해 얻어지고, 향기로움은 맑음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여러분, 절 이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긴 이후에 수행이 생긴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절이나 교회에 재정적 도움을 줄지는 모르나 알맹이는 소홀한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극단주의자들은 종교를 마약이라고 말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나는 절에 가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개선됩니다. 무엇 때문에 절에 가고 교회에 나가는지 그대그때 냉혹하게 물어야 합니다.
길상사가 10년이 됐습니다. 여러 분들의 노력으로 현재와 같은 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량은 건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건물은 언젠가는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절이 있기 때문에 수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있기 때문에 절이 있는 것입니다. 이 도량에 드나드는 여러분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왜 절에 오는가를 묻지 않으면 삶이 개선되기 어렵습니다.
스님들은 이 절에 머물다 가는 사람들입니다. 스님들은 그래서 절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재가자 여러분들만이 자자손손 절을 다니며 절을 지키는 주인인 것입니다.
10년 된 길상사도 이젠 변할 때가 되었습니다. 재가자가 승가에 귀의하는 것은 청정성 때문입니다. 승가는 오직 청정성이 그 생명입니다.
스님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다는 사람들은 주의하십시오. 일부 스님 중에는 ‘나만 믿고 살아라’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 그거 믿을 게 못됩니다.<웃음> 집버리고 나온 사람들을 뭘 보고 어떻게 믿습니까. ‘나만 믿고 살아라’는 따위의 말을 부처님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입니다. 자신에게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며,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그 밖의 것은 다 허상입니다. 여기에 불교의 참 면목이 있습니다. 냉혹한 것 같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 밖의 것은 다 허상입니다.
이 눈부신 봄날 피어난 꽃과 돋아난 잎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각자 험난한 세월을 겪어오면서 뿌린 씨앗들이 어떤 꽃을 피우고 있습니까. 봄날은 갑니다.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 제목도 있지만, 봄날은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저 돋아나는 꽃과 잎을 보면서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자료츨처 : 미디아붓다(www.mediabuddha.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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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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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가슴에 담에 가나이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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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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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자신에 밝고 맑은 빛을 찾아서 꾸준히 노력하고 탐색하며 소중하고 귀히 하루를 쓰겠습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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