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불자의공간
|
|
|
|
![]()
| 화엄경(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 7자를 독송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 |
|
|
2011-04-25 10:35:44, 조회 : 2,170, 추천 : 0 |
|
|
|
1. 화엄경의 종류
부처님이 개달으신 세계, 지정각 세간에는 우리 중생세간과는 달리 무수한 부처님이 있다. 그 숫자는 마치 삼천대천 세계의 땅덩어리를 부수어 먼지를 만드는 것과 같아 셀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정각 세간에서는 깨달으면 다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은 그에 따른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 즉 정보(正報)의 몸이 있고, 아미타불은 극락세계, 아촉불은 동방의 아촉세계, 남방의 환희세계, 북방의 무우세계, 중방의 화장세계 등 각각의 의보가 있다.
다시 말하면 무수한 부처님과 무수한 부처님이 사는 세계가 지정각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세계를 묘사한 화엄경은 지금은 80권이지만 원래는 엄청난 분량으로 구성된 경전이다.
상본 화엄경은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서 가루를 내어 먼지를 낸 수와 같은 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엄경의 내용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아무도 설명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줄여 놓은 화엄경을 중본(中本) 화엄경이라고 하는데 49881300품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중본 화엄경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정과 무정(無情)이 다 담겨져 있다. 이 방대한 화엄경을 줄이고 줄여서 우리 근기에 맞게 구성하여 놓은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약본(略本) 화엄경 80권이다.
그러나 이렇게 줄여놓은 화엄경도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화엄경에 나오는 글자 수를 옛 사람들은 10조 9만 5천 48자라고 세어 놓았는데, 이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방대한 양과 깊은 내용은 우리 중생의 근기로는 알 수 없는 점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중생들이 모두 사물을 자기 기준으로 해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인과(因果)의 업(業)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좋은 업을 받아들일때는 좋은 과를 맺고, 나쁜 업을 받아들일 때는 나쁜 과를 맺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자기의 기준을 떠나 실상의 세계를 보는 마음가짐으로 대하여야 조금이나마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 화엄경을 설한 때와 장소
화엄경을 설한 장소는 모두 일곱군데이다. 즉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화엄경을 설하였고 그 중에는 같은 장소에서 두 번을 설한 곳도 있기 때문에 칠처구회라고 한다. 이것을 품수로 나는 것이 39품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앞서 38품을 제외한 마지막 39품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이다. 왜냐하면 앞의 38품의 내용은 이미 '화엄경의 대의'에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입법계품은 복성(福城)의 동쪽에 있는 장엄당사라숲의 선재(善財)동자를 내세워 화엄경의 진리를 탐구해 가는 내용이다. 선재동자는 53명의 선지식을 만나는데 이것은 화엄경의 진리를 마치 53층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배워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입법계품의 내용을 우리가 잘 알ㅔ 되면 화엄경 전체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입법계품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화엄경의 제명에 대한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3. 화엄경 제명의 의미
화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대(大)는 크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크다는 것은 무엇이 크다는 것인가를 알아보자.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들 중생은 내 몸 속에 내가 하나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생명은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눈이 본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약 눈이 본다고 하면 눈만 떼어서 책상 위에 두어도 그것이 혼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것은 귀로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혀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눈이나 귀, 혀가 아니라 다른 어떤 정신적인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의 육체에 이 정신적인 기능이 들어오면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계성(法界性)이라고 한다. 법계성이 나에게 들어오면 내가 살고, 풀에 들어가면 풀이 살고,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가 살고, 바위에 들어가면 바위가 무너지지 않고, 물에 들어가면 물이 맑은 기운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법계성을 간직하고 육체라는 탈을 하나씩 덮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계성은 다른 말로 하면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이것을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신라의 고승 의상스님은 화엄경의 깊은 의미를 잘 함축시켜 계송을 지었는데 이것의 이름을 법성게(法性偈)라고 하신 것이다. 또 기신론에 가면 법(法)이라는 글자 하나로 법계성을 표현하였고, 법화경에서는 경의 제목에도 있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 해서 실상묘법(實相妙法)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법(法)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모든 불교인들은 불(佛), 법(法), 승(乘)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을 삼귀의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법이 나오고 있다. 또 법을 깨달은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 하고, 법을 깨닫지 못하고 배우는 사람을 불제자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법은 무슨 의미인가 생각해 보자. 기신론에서는 '소언법자 위중생심' 이라고 하였다. '법'이라는 말은 여러가지 생명의 중심'이라는 뜨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생명의 중심이 되는 것은 여러개가 아니고 하나이다. 그 하나 속에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뿐이고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법은 단지 그 이름이 있을 뿐 실체의 대상은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허공을 잘라 내 것을 만들 수 없듯이 법성 역시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육조스님은 육조단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상의 근본법성인 대열반은
둥글게 밝아서 항상 고요히 관조하건만
범부는 어리석어 죽는다 하고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한다 말하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몸 속에는 내가 따로 하나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중심이 되는 법계성은 공간적으로는 시방에 가득찼고, 시간적으로는 시간의 끝있는 데까지 가는 아주 큰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대(大)는 이렇게 큰 생명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크다는 것은 법의 체(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컵은 유리로 되어 있고, 촛대는 쇠로 되어 있고, 초는 백랍으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컵이 둥글고 가운데가 파여 있는 모습을 보고 상(相)이라 하고, 그것이 물을 마시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고 용(用)이라고 한다.
이러한 체,상.용을 우리의 마음자리에 비교한 것이 법의 체/상/용 이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체는 한없이 크고 깨끗하다는 것이 대(大)의 뜻이다.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란 말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방(方)은 이런 의미에서 법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상(相)이라고 한다. 법의 모양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 보이는 법의 모양이 눈에 가면 볼 수 있게 되고, 코에 가면 냄새를 맡고, 귀에 가면 듣게 되고, 몸에 가면 손으로 만지고, 발로 걸어가고 해서 묘양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모방(方)자를 쓰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대(大)자는 심지체요, 크다는 것은 마음의 덩어리, 즉 체를 말하는 것이고, 방(方)자는 심지상(心之相)이니 마음의 모양을 이야기한 것이며, 그것이 눈, 코, 혀, 귀, 몸에 들어가서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용(用)인 것이다.
다음의 광(廣)은 법의 용(用)의 한계가 넓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 역시 체용(體用)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불(佛)은 깨달음에이른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심지과(心之果)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씨를 심어서 정성을 다하는 공덕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씨를 심는 것을 화(華)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사 화는 심지인(心之因)이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듯이 부처의 경지는 마음을 닦아서 스스로 수행을 하면 가을에 실과가 달리듯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심지인은 보리심을 발하는 초발심(初發心)을 의미한다.
엄(嚴)은 마음자리에 장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행(心之行)이다. 마음자리에 장엄을 하는 것은 바로 실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가꾸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선 육바라밀의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로 자신의 마음을 가꾸며 실천하는 것이 심지행, 즉 '엄'의 바른 의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經)은 깨달은 바를 써 놓은 것이며 심지전(心之詮)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제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대방광 3자는 깨달아야 하는 객관의 대상인 소증지법계(所證之法界)이고 뒤의 불화엄경 4자는 깨닫는 주체인 능증지심(能證之心)을 말한다. 즉 대방광은 우주의 대진리인 법의 체/상/용을 설명한 말씀이며, 불화엄경은 스스로의 마음을 닦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를 나타낸 말씀이다. 따라서 화엄경은 경 전체를 읽고 외우는 것도 좋지만 경의 제목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일곱 자만 수지독송해도 대단한 공덕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 과천땅에 어떤 총각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는데, 7년이 지나자 그 동안 자기가 일한 품삯을 받고 자기 신세를 생각해 보니 30년이 다되도록 장가도 못간 처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서글퍼진 이 총각은 나도 한번 멋있게 살아보자는 큰 뜻을 품고 7년간 일한 품삯을 받아 떠나기로 하였다.
이 총각은 길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 사기문(시체를 버리는 문) 옆의 장님에게 점을 치러 갔다, 총각은 장님에게 7년간 일하여 받은 품삯을 복채로 주고 점을 쳐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점쟁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7자를 써 주는 것이었다.
총각은 자기가 7년 동안 받은 많은 품삯을 주고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자신의 운명을 알려고 했는데, 고작 종이에다 일곱 글자만 써주고 뜻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가져가라고 하니 그만 정신이 나가 미쳐버린것이다. 그래서 총각은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하면서 이리저리 길거리를 헤매다 산 속으로 들어가서도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산꼭대기 바위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외우다 그만 지쳐서 쓰러졌는데, 비몽사몽간에 시커먼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총각이 그에게 "무슨 연유로 나에게 나타났는가"하고 묻자 그는 "나는 전생에 너무 탐심을 내어서 뱀의 몸을 받아 수백년 동안을 도랑 바닥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 도랑바닥에 있는 큰 바위, 작은 바위는 모두 금덩이이다. 나는 뱀의 몸을 받고서도 이 금덩이가 아가워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대가 대방광불화엄경을 외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천상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인사라도 하려고 왔다. 당신에게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니 만약 이 세상에 살면서 필요하다면 저 밑의 냇가에서 바위를 건져 요긴하게 쓰라"는 것이었다.
총각이 일어나 냇가로 가보니 그 곳에는 황금이 가득 있었다. 총각은 비로소 자기가 7년동안 받은 품삯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을 받은 것이 헛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금을 주워다 팔아 논, 밭, 집,도 사고 장가도 가게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일곱 자만을 외우는 것에도 이렇게 큰 공덕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경의 이름 자체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을 외움으로 인해 이 기운이 몸에 들어가 그대로 법계(法界), 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옮긴글 |
|
|
|
|
|
|
|
|
|
|
|
|
ⓒ 2001-2004 by Passkorea Co., Ltd. All rights reserved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