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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23:05:12, 조회 : 1,024, 추천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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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이 글을 읽어줄 네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슬기롭고 아름다운 소녀이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슬기롭다는 것은,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 가지고도 커다란 보람이기 때문
이다
일전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종로에 있는 제과점에를 들른 일이 있다. 우리 이웃 자리에는 여
학생이 대여섯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애들이 깔깔거리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슬퍼지려고 했어.
그 까닭은, 고1이나 2쯤 되는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때문이었다. 우리말고도
곁에는 다른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그애들은 전혀 이웃을 가리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더구나. 그
리고 말씨들이 어찌도 거친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말씨는 곧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 아니니?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주고받는 말은 우리들의 인격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하는
거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녀들의 입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
니? 꽃가지를 스쳐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 하고 죽을 우리인데.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
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휘발유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
지거리는 듣는 마음속까지 상하게 하니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야.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어.
욕지거리가 인간의 대화로 통용되고 있는 요즘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
했거나 생활환경이 무질서한 그런 애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니.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보람"이란 말을 앞에서 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뭘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 듯하게 치장해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마니까.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
어.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할 거야.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도 있
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에.
나는 미스 코리아라든지 미스 유니버스 따위를 아름다움으로 신용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잡
지의 표지나 사진관 앞에 걸린 그림처럼 혼이 없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
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아름다움이란 겉치레가 아니기 때문이지. 상품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이라면 거죽만을 보려는 맹점이 있어.
꽤 있었는데 그애들은 전혀 이웃을 가리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더구나. 그리고 말씨들이 어찌도
거친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 아니니?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
도 있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주고받는 말은 우리들의 인격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
하는 거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녀들의 입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니? 꽃가지를 스쳐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 하고 죽을 우리인
데.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
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휘발유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
지거리는 듣는 마음속까지 상하게 하니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야.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어.
욕지거리가 인간의 대화로 통용되고 있는 요즘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
했거나 생활환경이 무질서한 그런 애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니.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보람"이란 말을 앞에서 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뭘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 듯하게 치장해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
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마니까.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어.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할 거야.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
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에.
나는 미스 코리아라든지 미스 유니버스 따위를 아름다움으로 신용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잡
지의 표지나 사진관 앞에 걸린 그림처럼 혼이 없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
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아름다움이란 겉치레가 아니기 때문이지. 상품가치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이라면 거죽만을 보려는 맹점이 있어.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려
고 갖은 수고를 다한다더군. 값진 화장품을 써야 하고, 사람이 먹기도 어려운 우유에 목욕을 하
는가 하면 무슨무슨 운동을 하고, 값비싼 옷을 해 입어야 하고.........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대인들은 그저 나타내
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 겉치레에만 정신을 파느라고 속을 다스릴
줄 모른단 말야. 이런 점은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한테 배워야 할 거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 어떤 시인의 말인데,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결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
풀어준다는 거야. 그러나 그 꽃은 누굴 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
어난 것이래. 숲속의 새들도 자기의 자유스런 마음에서 지저귀고 밤하늘의 별들도 스스로 뿜어
지는 자기 빛을 우리 마음에 던질 뿐이란 거야. 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러는 것
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 이미 잉태된 큰 힘의 뜻을 받들어 넘치는 기쁨 속에 피고 지저귀고
빛나는 것이래.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안에서 번져 나오는 거다. 맑고 투명한 얼이 안에서 밖으로 번져 나와야
한단 말이다.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 그럴까. 서로 뒤바뀌지 않게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일까? 아닐꺼야, 아니고말고. 그건 저마다
하는 짓이 달라서 그런 거지.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
굴 모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일 거다.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아름답게 얼을 가꾸어와서 그럴거고, 추한 얼굴은 추한 행위만을 쌓아왔기 때문에 그럴 거야. 그
렇다면 아름답고 추한 것은 나 아닌 누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행위에 의
해 그러한 꼴(탈)을 덮어썼다는 것이지.
어이, 욕지거리를 잘하는 미인을 상상할 수 있겠어? 그건 결코 미인이 아니야. 그리고 속이
빈 미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또한 슬기로움과 서로 이어져야 해.
슬기로움은 우연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 순수한 집중을 통해 자기 안에 지닌 빛이 발하
는 거지. 나는 네가 시험 점수나 가지고 발발 떠는 그런 소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골빈
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있음으로 해서 네 이웃이 환해지고 향기로워질 수 있는 그런 존재
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소녀라는 말은 순결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기로운 본질을 가꾸는 인생
의 앳된 시절을 뜻한다.
너의 하루하루가 너를 형성한다. 그리고 멀지 않아 한 가정을, 지붕 밑의 온도를 형성할 것이
다. 또한 그 온도는 이웃으로 번져 한 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너의 "있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누이야, 이 살벌하고 어두운 세상이 너의 그 청청한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도록 부디 슬기로워 지거라.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라. 그것이 곧 너 자신일 거다.
(종현, 1971. 12.)
진리는 하나인데 --기독교와 불교
베다니에서 만난 사람들
이태 전 겨울이던가, 서대문에 있는 다락방에서 베다니학원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연사
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대개가 목사의 부인 되는
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강연을 하면서도 이상한 착각에 속으로 갸웃거렸었다.
여러 청중 속에 대여섯 사람들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꼭 만난 사람
들 같은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주관하던 법회였든지, 아니면 출가 이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분들이었든지. 어디서 본 얼굴들 같은데 도무지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
았다.
그런데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그 얼굴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 얼굴들
은 실제로 어디서 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이 밖으로 번져나옴으로 해서, 기
왕에 알았던 사람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전생에 이웃에서 살던 사촌들이었
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사람끼리 친근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밖에 드러난 거죽에서 보다도 투명한 영혼에 의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는 뒷날 또 만나게 되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는 뒷날 또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번 만난 사람들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나는 운수행각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해질녘 속리산에 들르게 되
었다. 객실에 행장을 푼 뒤 개울가에 나가 먼지를 털고 오는데,
"법정 스님 아니세요?"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때 베다니에서 만난 어머니들이었다. 뜻 아닌 데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언젠가 붉은 줄을 그어가며 읽던 막스 밀러의 글이 생각났다.
"........사방이 어두워졌을 때, 마음속 깊이 혼자임을 느꼈을 때, 그리고 사람들이 좌로 우로 지나
가면서도 서로가 누구인지 모를 때에 잊었던 감정이 우리 가슴속에서 용솟음쳐오르게 된다. 우
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우정은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우리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저를 모르셔요?" 하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한 때에 인간과
인간의 사이는 형제의 사이보다도, 부자간보다도, 친구지간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때 타인은 결코 무연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의 분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
리는 서로가 아무말도 없이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그릇된 고정관념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에 대해
대인관계에 있어서 너그럽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인관계에 이교도로 향하게 될 때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수가 더러 있다. 너그러웠던 아량이 갑자기 움츠러들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우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대접을 받는다. 물건을 사기위해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은 정
확한 발음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 물론 얻으려 온 탁발승으로 오인하고 한 말일 것이다. 태연하게 물건을 골라 돈을
치르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복잡한 표정이다. 혹은 기독교인들끼리 산사에서 놀러와 어쩌다 찬송
가라도 부를라치면 기를 쓰고 제지하는 산승들이 또한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씁쓸한 현상은 어디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라기보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 드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고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
각하고 있는 맹목에서일 것이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마치 자기의 신심을
두텁게 하는 일인 양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견들이 읽는 경전이나 성경의 해석 또한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말이나 말 뒤에 들어 있는 뜻을 망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앞는 표면적인 언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종교이고간에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상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맹목적인 숭배물로 되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
질 수 있다. 그런데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은 성급하게도 의식을 거치지 않
고 비판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인식이 없는 비판이란 건전한 비판정신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
리들이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자연 타종교의 본질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전까지 기독교도와 불교도 사이에 바람직한 대화의 길이 트이지 못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상호간에 독선적인 아집으로 인한 오해에 있었을 것이다. 출세간적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
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오늘날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한다면 어떻게 될끼? 그릇
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으르렁대는 사이비 신자들과는 그 촌수가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의
기가 상통한 그들은 구태여 입을 벌려 수인사를 나눌 것도 없이 서로가 잔잔한 미소로써 대할 것
만 같다. 그들의 시야는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맺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한 그루의 나무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다.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가 형제임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끼게 된다. 근래 종교인들끼리의 모임이 활
발해지면서부터는 종래 편견에 사로잡힌 이해 이전의 상태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
그러니까 뭣보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소중하다. 만나지 않고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또한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남은 일종의 개안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 이야기함으로써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인식의 들녘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
금까지 보이지 않던 영역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외롭게 떠 있는 섬이 아니라, 같은 대지에 맺어져 있는 불가분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리그 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
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
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이 빈 마음으로
대장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문제는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
르지 못한 데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
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
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볼 때 털끝만치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있는 하나의 "길"
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
해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요한의 첫째 편지-4장 12절)
(기독교사상, 1971. 7.)
역마기행
오늘날 우리들의 나날은 한말로 표현해 소음이다. 주간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매스미디어는
현대인들에게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달라고 몹시도 보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입술에서도 언
어를 가장한 소음이 지칠 줄 모르고 펑펑 쏟아져 나온다. 무책임한 말들이 제멋대로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진정한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시장이나 전장에서 통용됨직
한, 비리고 살벌한 말뿐이다. 맹목적이고 범속한 추종은 있어도 자기 신념이 없기 때문일까. 이
렇게 해서 현대인들은 서로가 닮아간다. 동작뿐 아니라 사고까지도 범속하게 동질화되고 있다.
다스리는 쪽에서 보면 참으로 편리할 것이다. 적당한 물감만 풀어놓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허우
적거리는 무리를 보고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까 소음에 묻혀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은 접촉의 과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다에서
인간적인 허탈에 빠지는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끝없이 방황한다. 잿
빛 소음에 묻혀 생명의 나뭇가지가 시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대지에 가을이 오니 그래도 마른 바람 소리가 수런거렸다. 귓전으로가 아니라 옆구리
께로 스치는 그 소리를 들으니 문득 먼길을 떠나고 싶은 묵은 병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
날로 털고 나섰다.
서라벌! 그렇다, 신라로 가자. 불국사 복원공사의 현자을 언제부터 보고 싶었다. 동대문 고속
버스 정류소에서 경주행을 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소음의 도시여." 제3한강교를 벗어나자
천장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그네 길에 가끔 들리는 음악은 정다운 길벗일 수 있다.
마른 바람 소리 같은 구실을 해주니까. 무심히 창밖에 던진 시야에 초점을 맞추어주기도 하니
까. 그래서 여독을 씻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계속해서 울려 퍼질 때 그것은 정다운 길벗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곤
욕이었다. 그 음악이라는 것도 한결같이 파리똥이 덕지덕지 붙은 곡조들뿐. 북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도, 왜 남한의 곡조와 가사는 저렇듯 청승맞고 병들어 있는가 싶었다. 가위 자유대한의 그
자유라는 빛깔을 저렇게 각색해야만 하는가 싶었다. 누가 이런 소리를 듣고 눈을 지그시 감을
수 있단 말인가.
견디다 못해 안내양에게 좀 쉬어가면서 듣자 했더니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거듭 요구하자
"다들 좋아하는데 왜 그래요?" 하면서 눈을 흘겼다. 곁자리를 보니 가락에 맞추어 발장단을 치
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행자라는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내가 낸 돈으로 차가 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내 뜻은 전혀 삽입될 수 없다. 모처럼 소음의 일
상에서 맑고 조용하게 날개를 펴고자 나그네가 되었는데 소음은 "카 스테레오"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줄곧 나를 추적해오고 있는 것이다. 아, 소음이 문명이라면 나는 미련없이 정적의 미개쪽에
서겠다.
연변에 울긋불긋 덮인 슬레이트 지붕들, 산자락이나 개울가하고는 아무래도 조화가 안 되고 있
는 그 슬레이트의 어설픈 덮개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의 유행가를 있는 대
로 몽땅 내뱉으며 달리고 있는 이 고속버스가 네발 달린 차량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포요 전율이었다. 차를 몰고 가는 운전수와 차장격인 정부는 국민의 식성에는 아랑
곳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락만을 줄기차게 틀어댈 것이다. 자기네의 상식으로 손님들의 양식
을 잴 것이다. 손님들이 낸 요금(세금)으로 달리고 있으면서, 카 스테레오까지도 그 돈으로 돌리
면서 손님들의 의사는 전혀 모른 체할 것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반나체 춤을 보이려고 자기네끼
리 곧잘 어울리는 워커힐 같은 데로 데려갈지 모른다. 부질없는 상상일까.
서울에서 경주까지 예의 소음 때문에 나는 나그네의 멋을, 홀가분한 그 날개를 잃고 말았다.
1300원어치의 소음에서 내리니 심신이 더불어 휘청거렸다. 서라벌은 간데 없고 관광도시 경주
가 차디차게 이마에 부딪쳤다.
외부의 소음으로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비극이다. 설사 행동
반경이 달나라에까지 확대됐다 할지라도 구심을 잃은 행동은 하나의 충동에 불과한 것. 그런데
문제는 그 소음에 너무 중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청각이 거의 마비상태라는 점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음의 궤짝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일상인들. 그것을 밑천으로 바보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는 똑똑한 문명인들.
자기 언어와 사고를 빼앗긴 일상의 우리들은 도도히 흐르는 소음의 물결에 편승하여 어디론지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도 하나의 소음일 경우가 많다. 왜
냐하면 그 소음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소음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의 말이 소음이라면, 그로 인해서 빛이 바랜다면 인간이 슬퍼진다. 그럼 인간의 말
은 어디에서 나와야할까. 그것은 마땅히 침묵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앞
는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이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
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되고 자기 말에 책임을 느낀다. 그러
기 때문에 투명한 사람끼리는 말이 없어도 즐겁다.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을 뿐 무수한 말이 침
묵속에서 오고 간다.
말 많은 이웃들은 피곤을 동반한다. 그런 이웃은 헐벗은 자기 꼴을 입술로 덮으려는 것이다.
그런 말은 소음에서 나와 소음으로 사라져 간다. 그러나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들린다. 그러니까 인간의 말은 침묵에
서 나와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이전에 깊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는 정말 피곤한 소음의 시대다. 카뮈의 뫼르소가 오늘에 산다면 이제는 햇빛 때문이 아니
라 소음 때문에 함부로 총질을 할지 모르겠다.(현대문학, 1972. 12.)
나의 애통가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청마 유치환의 (심산)이라는 시다. 시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내 생
활의 영역에 탄력을 주는 이런 언어의 결정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수 없다.
언제부턴가 말년을 어떻게 회향할까를 생각했다. 새파란 주제에 벌써부터 말년의 일이냐고 탓
할지 모르지만, 순간에서 영원을 살려는 것이 생명현상이 아니겠는가. 어떤 상상은 그 자체만으
로도 현재를 보다 풍성하게 가꾸어주는 수가 있다. (심산)은 내게 상상을 날개를 주어 구만리 장
천을 날게 한다.
할 일 좀 해놓고 나서는 세간적인 탈을 훨훨 벗어버리고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어디에도 거리
낄 것 없이 홀가분하게 정말 알짜로 살고 싶다.
언젠가 서투른 붓글씨로 (심신)을 써서 머리맡에 붙여 놓았더니 한 벗이 그걸 보고, 왜 하필이
면 궁상맞게 이를 잡느냐는 것이었다. 할 일이 없으니 양지 바른 바위에 앉아 이나 잡을밖에 있
느냐고 했지만, 그런 경지에서 과연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물론 불가에서는 조그만한 미물이라
고 살생을 금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저쪽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끊
어지는 일이니까.
각설, 주리면 가지 끝에 열매나 따 먹고 곤하면 바위 아래 풀집에서 잠이 든다. 새삼스레 더
배우고 익힐 것도 없다. 더러는 솔바람 소리는 들으며 안개에 가린 하계를 굽어본다. 바위틈에
서 솟는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인다. 다로곁에서 사슴이 한쌍 졸고 있다. 흥이 나면 노래나 읊
을까? 낭랑한 노랫소리를 들으면 학이 내려와 너울너울 춤을 추리라.
인적이 미치지 않은 심산에서는 거울이 소용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 테니
까.
일력도 필요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산울림 영감처럼 살고 싶네.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네.(여성동아, 1972. 11.)
불교의 평화관
친선경기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사실상 전쟁상태에 놓여 있는 우리 현실을 돌아볼 때에 불안의 그림자는
이 구석 저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정치를 업으로 삼고 있는 세계의 헤비급 챔피언들이 지구가
좁다는 듯이 사방으로 분주하게 뛰고 내닫는 것도 오로지 세계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상에서는 단 하루도 싸움이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되어먹은 것인가?
인간이 잘살기 위해 마련한 기술문명이 사상 유례없이 달에까지 치솟게 된 오늘날, 인간의 대
지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날로 물씬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 구조는 어딘
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곧잘 다룬다. 뿐만 아니라 전쟁놀이도 겸하고 있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예쁜 인형과 함께 총과 칼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여운 고사리 손이 살육하는 연장에
익숙해지도록 성인들이 몸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운동경기 종목 가운데는 권투와 레슬링이라는 게 있다.
이 두 가지 경기는 그 어떤 경기보다도 관중들을 미치게 하고 환장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라
와 나라 사이의 경기일 경우 링 위에서 치고 받는 선수뿐 아니라 관중들도 함께 사우고 있는 것
이다. "밟아라! 죽여라!" 하는 함성과 함께 때로는 돌멩이가 날고 술병이 던져진다. 이런 걸 가
리켜 그래도 친선경기라도 한다.
인간끼리 마주 붙어 피를 찾으며 치고 받는 이런 행위가 경기 종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한,
인간 촌락에 싸움이 그칠 날은 멀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경기의 확대판이 아니겠는
가. 오늘날의 전쟁은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 양상이 점점 처절해지고 있다. 비전투원끼리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차대전 이래 부녀자들까지도 대량학살의
재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종교인이 과거처럼 부동자세로써 청산백운이나 바라보며 초연하려 한다면 그
런 종교는 없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일체 중생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곧 종교의 과제이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염원과 노력은 오늘의 종교가 문제삼아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불교의 평화 사상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평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인류 역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 윤리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비다. 중생을 사랑하여 기
쁨을 주는 것을 자라 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 일을 비라 한다. 그러니까 자
비는 인간 심성의 승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
했다.
"어머니가 자기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 없는 자비
심을 일으켜야 한다."(숫타니파이타, 149)
지극한 자비에는 멀고 가까움이나 원수와 동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만인의 벗, 일체 중생의 동정자. 자비한 마음을 길러 항상 아힘사를 즐기노라."
(장노-, 648)
"그러므로 적에게도 자비를 베풀어라. 자비로 가득 채우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밀란다 왕문경)
인간 존재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조는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 있다는 것은 함
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서로 서로 의지하여 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쪽의 불행이 내게 무연하지 않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
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말은 연기의 공리이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존재의 실상인 것이다.
초기 교단에서는 국가 권력을 향해 전쟁을 포기하도록 여러 가지로 노력했었다. "원망은 원망
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원망을 쉬어버림으로써 그것은 풀린다"고 했다. 빔비사라 왕이 이웃
나라 밧지족을 공격하려고 불타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불타는 여러 가지 저쪽 상황을 물은 뒤
무익한 전쟁을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죽이지 않고 해치지 않으며, 이기지 않고 적에게 이기도록 하지도 않으며, 슬프게 하지
않고 법답게 다스려야 합니다."(상응부 경전 제1권)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라 할지라도 맞서 싸우기보다는 권지로써 화평하라고 했다.
무엇이 평화의 적인가
얼마 전 조조에 영화 "솔저부루"를 보고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마음에서 싹튼 증오가 불붙기 시작할 때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만다. 어떠한 전쟁
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인 승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어리석은 증오심
과 부질없는 탐욕에 스스로 타서 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세계의 움직임이란 외형적인 현상만으
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기의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세계의 방향은 근원적으로 각 개인
의 동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세계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은 곧 그
세계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영향력을 가진 세계적인 정치가의 동작은 그만큼 큰 반응을 초래한다. 그들이 세계평
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솔저부루"를 당사국인 미국에서 만들어낸 일만큼이나 다행
한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노력은 그들의 마음에서부터 탐욕과 분노와 무지를 씻어버리는 일이다. 이기
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함께 살고 있는 이웃에게 보시와 자비와 지혜를 베
푸는 일이어야 한다. 국제간에 경제적인 균등한 분배 없이는 그 어떠한 평화도 없다. 과거 평화
를 깨뜨린 원인들을 상기해볼 때 절대 다수의 뜻에서가 아니라 소수 지배계층의 행동양식이 결정
적인 구실을 했다. 더구나 핵무기가 등장한 현대전의 결과는 어느 쪽에도 승리란 있을 수 없게
됐다. 인간에게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그 마음에 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
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
우리는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서로 의지해 사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대학불연보, 1971. 6.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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