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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에 만연해 있는 천도재, 불교를 심판의 종교로 변질시켰다”
眞虛性宗 2012-05-14 10:59:34, 조회 : 1,919,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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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6일 열린 제11회 법림 대중법회에서 적연 이제열 법사가 정법에 배치된 채 치러지는 한국불교의 천도재 관행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진=김진호 기자


대승정법 재가결사 법림(法林)을 이끌며 파사현정에 입각한 설법으로 한국불교계에 정법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적연 이제열 법사가 지난 5월 6일 열린 제11회 법림대중법회에서 한국불교계에 만연한 빗나간 천도재의 현실을 강하게 질타했다. ‘중생들이 죽음과 천도재’라는 주제로 봉행된 이날 법회에서 이제열 법사는 비불교적 행사로 변질된 한국불교의 천도재 관행을 낱낱이 파헤치고 이의 개선을 촉구했다. 이제열 법사는 “스님 등 지도층이 변하지 않는다면 재가불자들이 변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행하고 있는 신행 형태가 과연 정법에 부합 되고 있는지를 돌아다보고 점검 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행해진 이제열 법사의 설법 내용을 게재한다. 편집자.
자료출처 : 미디어붓다(www.mediabuddha.net)

“현재 치러지는 천도재 대부분 정법과 거리 멀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그 넋을 위로하고 좋은 곳에 나기를 기도한다. 사는 동안의 한과 이 세상과의 작별에 대한 슬픔을 씻어 버리고 누리지 못한 행복을 저승에 가서라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특히 종교에서는 각 종교마다 내세를 이야기하고 죽은 이들이 신앙의 힘이나 의례를 통해 구원 또는 제도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

이는 불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윤회를 내세관으로 삼고 있는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천도재라는 의식을 통하여 죽은 영혼들의 안락을 빌어 왔다. 불자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일반인들도 천도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종교 유무에 관계없이 이 의식에 한번쯤은 참석하기도 했을 것이다. 요즈음에는 이 천도재가 다른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 종교의 교리와는 배치되는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방법의 의식을 만들어 따라 행할 정도이다.

타 종교의 세력이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천도재는 과거보다 더욱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불교에서 망자를 초청하여 부처님 앞에서 음식을 베풀고 법문을 듣게 하여 좀 더 차원이 높은 세계에 태어나도록 의식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지극히 권장 할 만 한 일이다. 망자는 이로 인해 금생의 업장과 한을 씻고 유족들은 이별에 따르는 비통함과 절망감을 없애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천도재 관행에는 무엇인가 아직도 미비하고 왜곡된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분명히 현재 행하고 있는 불교 안에서의 망자를 위한 천도의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법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불교의 천도재가 교리적으로 완전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교의 천도재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일반 천도재와 사십구재와 생전예수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천도재는 솔직히 교리적으로 매우 혼란한 양상을 띠고 있다.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은 망자에 대한 천도의식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항아리경>의 일화에서 보듯 중생은 선행과 악행의 결과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이지 의례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셨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허공 가운데서 일정한 기간 동안 머물다가 새로운 몸을 받는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지 않다.

많은 불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사십구일 만에 몸을 받는다는 것을 부처님은 직접적으로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승경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승경전 대부분을 살펴보아도 천도재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다만 경 가운데에 지장보살 본원경과 논서인 <대비바사론>과 <유가사지론> 등에 에 잠깐 비치고 있을 뿐이다.


사후 몸 받지 못하고 허공 떠돈다는 가르침 불교엔 없어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중생의 몸이 무너져 죽음이 찾아오게 될 때에 의식(意識)도 함께 끝나게 되는데 금생의 마지막 의식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다음 생의 의식을 일으키게 하여 새로운 몸을 받게 한다고 말한다. 금생의 마지막 의식을 사몰식(死沒識)이라 하는데 이 식은 내생을 연결시키는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 되어 금생의 최초 의식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금생의 최초 의식은 부모의 정혈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이 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입장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중생이 죽어서 일정기간 동안 몸을 받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고 있다는 교설은 초기 불교와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금생과 내생이 연결되는 시간은 찰나적이기 때문에 일초도 머물 시간이 없다고 주장한다. 대승의 유식학에서는 윤회의 주체로 아뢰야식설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 아뢰야식설이 천도재의 근거가 되는 학설이다. 찰나생멸하는 아뢰야식 가운데의 업종자가 내세를 결정짓고 태어나게 될 부모의 정혈에 의탁하여 새로운 생애가 시작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내세관은 위에서 거론한 대승의 일부 사상에 의해 변용 되고 그 변용 된 일부 사상이 중국을 거쳐 확대되어 오늘날과 같은 정형화 된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러한 대승불교에 기반을 둔 영혼설과 윤회설 그리고 이에 따른 천도의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머리 기른 재가법사지만 사십구재의식을 권장하고 있고 더러 천도재를 집전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의 천도의식이 초기불교와 입장을 달리 한다 해도 대승의 학설과 그 의식이 중생들에게 올바른 인생관과 생사관을 심어 줄 수 있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이 천도 의식이 지니고 있는 비 불교적 요소들이다. 천도재는 대승의 교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매우 비틀린 시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람이 죽고 나면 일곱 번에 걸쳐 저승의 판관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심판론이다.

천도재의 좋은 의미 77재 등 비불교적 심판론으로 변질

불교의 사십구재의 사십구일 설은 망자가 몸을 받게 되는 시기를 대승에서 대략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지 일곱 번에 걸쳐 심판을 받아 태어나게 될 몸이 결정 된다는 심판교설이 아니다. 아뢰야식을 가르치고 있는 대승의 논서에도 심판설은 등장하지 않는다. 혹 일부 경전에서 그와 같은 심판을 언급했다 손 치더라도 이는 불교 전체의 법성과는 동떨어진 교설로 정당성이 없다. 따라서 지장신앙을 앞세워 행하고 있는 심판론에 입각한 천도재는 부처님이 설파하신 생사관과 정면으로 배치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천도재가 문제가 아니라 심판론적 칠칠재가 문제인 것이다. 심각한 일은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불교를 심판의 종교로 받아들이고 영혼이 마치 저승을 다스리는 신들에 의해 그 운명이 좌지우지 된다는 오해를 낳게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천도재의 문제는 소위 생전예수재라는 의식에서 그 심각성을 더하게 한다.

요즘 절을 방문하게 되면 심심치 않게 생전예수재를 봉행한다는 현수막을 발견 하게 된다. 생전예수재는 죽고 난 뒤에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살아서 미리 자신을 천도시키자는 취지에서 나온 의식이다. <지장시왕경(地藏十王經)>, 혹은 <염라수기칠재공덕왕생경(閻羅受記七齋功德往生經)>과 같은 중국 당·송 시대에 만들어진 위경에 근거하여 진행 되고 있는 생전예수재는 아무리 근기 따라 중생들을 제도 한다지만 저급하기 짝이 없다. 생전예수재의 형식과 내용을 한번 들여다 볼 것 같으면 이 의식은 모든 것이 심판자들에 의해 중생의 내세가 결정되는 것처럼 나타나 있다. 일단 죽기 전에 미리 천도를 시킨다는 말도 엉터리지만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에서 존재여부도 불분명한 잡신들을 모아 놓고 공양 축원하는 짓거리도 유치하기만 하다.

사십구재나 일반 천도재는 공양의 대상이 불보살이다. 그런데 이 생전예수재의 공양의 대상은 부처님 외에 인도 중국 한국에서 숭배하고 있던 잡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심판을 한다는 열 명의 저승 판관들의 이름을 보라. 염라대왕은 인도의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의 도교에서 추앙 하는 신들이다. 그밖에 풍도대제니 하원지관이니 하는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신들을 비롯하여 일직차사니 인황차사니 하는 하급 신들도 모두 중국 도교의 신들이다. 참으로 더더욱 한심한 일은 이런 생전예수재를 올리면서 저런 시왕들을 향해 자신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믿는 행태들이다.


도교의 잡신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거는 생전예수재 한심

생전예수재의 내용을 보면 저런 여러 저승 신들은 아무나 심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속 된 사람들을 상대로 죄와 복을 물어 상을 주든지 벌을 주든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수재에 동참한 불자들은 자신을 심판할 판관이 누구인지 택해야 하는데 이 기준이 바로 음양오행에 입각한 사주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경오생이거나 신미생이거나 경인생인 경우에는 진관대왕이 심판을 하고 무자생이거나 기축생이거나 경인생의 경우에는 초강대왕이 심판을 하고 경자생이거나 신축생이거나 임인생의 경우에는 염라대왕이 심판을 하므로 공양을 각각 자신을 관장하고 있는 판관들에게 올려야 한다.

정말 들여다보면 볼수록 비(非) 불교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예수재 속에 가득 차 있다. 언제 부처님이 이런 귀왕들을 인정하였으며 인간들의 죄업을 심판하라고 명령했던가? 또 언제 우리 불자들에게 자신의 내세에 대한 길흉화복이 이런 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설하셨던가? 천지를 창조했다는 신도 인간의 길흉화복을 마음대로 못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진리인데 저런 케케묵은 잡신들과 사주설(四柱設)을 끌어들여 정법을 왜곡하고 혹세무민에 앞장서다니 정말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내세의 결정이 어떤 심판이나 명령이 아닌 금생의 행위에 의해 결정 된다고 고구정녕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불교는 아직도 구습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방편이니 근기니 하는 말들을 앞세워 미혹한 신도들의 허점을 이용해 지갑을 털게하고 있다.

나는 분명하게 제발 이따위 생전예수재 같은 의식을 지금부터라도 폐기처분해버리라고 요구한다.


사찰과 스님들이 변하지 않으면 재가자들이 변해야

이 천도재의 문제 점 중에 또 하나는 천도재의 남용이다. 현재 한국 불교의 대부분의 사찰 운영을 들여다보면 사찰이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천도재를 망자가 죽은 지 사십구일에만 올린다든가 백중날 하루만을 택해 올렸는데 요즘은 백중 사십구일 천도재니 백일천도재니 하여 틈만 나면 천도재로 신도들을 몰고 가려는 경향이 짙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이를 조상 탓이나 영가 탓으로 돌려 천도재를 지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잘 아는 어떤 신도가 가정에 문제가 생겨 이름 있는 사찰을 찾아가 큰 스님을 뵙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간신히 큰스님을 뵙고 현재의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느냐고 여쭈었더니 큰스님은 여러 생각 말고 집안에 영가들이 몸을 받지 못해서 그러니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란다. 이게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사찰은 부처님의 법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곳이다. 설법과 기도와 경 공부와 수행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어야 할 곳이 사찰인데 우리 한국 불교는 죽은 귀신들을 제사 지내주는 사당으로 변해 버렸고 많은 출가자들은 퇴마사나 집전승으로 전락 해버렸다. 나는 한 번도 천도재에 참석한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이 천도재 의식을 행하고 나서 감동을 받았다든가 불교에 귀의 하고 싶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묻는다. 한국불교에서 천도재는 진정 망자들과 유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찰 운영을 위한 방편이나 개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교묘한 속임수로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참다운 천도는 천도재의 액수나 겉보기에 그럴듯한 의례 의식에 있지 않다. 천도재는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부처님 앞에서 법문을 듣고 생전의 집착과 슬픔을 버리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생을 맞이하려는 의식이다. 아무리 도가 높은 수행자라 할지라도 망자의 혼을 불러내어 지옥으로 보내거나 극락으로 보낼 수 없다. 이제 천도식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한다. 사찰운영을 위한 방편, 상업화 신비화, 기복화 미신화 된 의식에서 과감히 탈피해 망자와 유족들에게 진정한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생사관을 심어주어 진정 생사고뇌의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인도 해 주어야 한다.

공연히 법력을 앞세우고 도력을 앞세워 마치 죽은 망자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라도 할 수 있는 양 행동하는 수행자나 지도자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변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다. 특히 나는 한국불교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 가운데에서도 잘못 횡행되어지고 있는 불교의 그릇된 방편들과 설법에 대해서 개선해 나갈 것을 요구해오고 있다. 이제 지도층이 변하지 않는다면 재가자들이 변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행하고 있는 신행 형태가 과연 정법에 부합되고 있는지를 돌아다보고 점검 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 되어야한다.

자료출처 : 미디어붓다(www.mediabuddha.net)
wndtodrnwp [2012-05-17] : 허허 모처럼 그 법문을 보고 있으니 허뭇하나 정확한 법문이 더욱 아쉽다 왜냐 법사란 즉 부처님의 제자를 보고 하는 말이며 그 자체가 천지의 법을 받아야 하는데 그 법명을 보니 아직은 설익은 자 일 뿐이라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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