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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자의공간

 범부 중생의 견성(見性)과 성불(成佛)에 대하여
鏡潭 2013-06-18 21:52:29, 조회 : 1,876, 추천 : 0
  첨부파일 : 불심사-범부중생의 견성과 성불.hwp (64kb)   다운 : 657

< 범부 중생의 견성과 성불에 대하여 >

천하의 모든 종단과 종파가 견성성불을 이야기하고
견성성불을 위한 삼매와 지혜들을 쏟아내며
여러 가지 수행법들을 설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네 범부중생에게는
다가설 수도, 그렇다고 도저히 벗어 내던져 버릴 수도 없는
어떤 결계가 씌워져 있는 것 같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웃종교인 기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초교리이자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원죄(原罪)라는 것이 있는데
가히 이 원죄(原罪)와 비유될 것 같다.

말하자면 기독교에서의 이 원죄(原罪)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는 여호와가 태초에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여 낙원(樂園)인 에덴에 살게 하면서,

‘너희들이 따 먹으면 죽으리라’ 계명(誡命)을 내려  
선악과(善惡果) 나무의 열매만을 먹지 못하게 하였는데

뱀으로 변신한 사탄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이브가  
‘선악(善惡)을 알게 되고 창조주인 여호와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창조주의 계명으로 금지한 그 열매를 따 먹고
선(善)과 악(惡)을 알게 되었다는 죄(罪)를 말한다.

이 죄(罪)는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도 규정되어 있다.

이렇듯 원천적으로 인간에게 씌워져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원죄(原罪)처럼, 불교에서도
  
‘중생이란 중생이 갖고 있는 온갖 탐진치(貪瞋痴)로 인해
세속(世俗)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면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곤
두터운 업장(業障)들이요 헤아리지도 못할 죄업들뿐이어서,

이들 업장과 죄업(罪業)으로 인해 중생들은
헤아릴 수도 없는 윤회를 거듭하며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생로병사의 번뇌와 고통을
하릴없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결코 벗어 던질 수 없는 멍에를 씌우고
또 이 멍에를 불교의 모든 교리 전체에 깔고 있다.

불교의 공부를 시작하여 크고 작은 얻음이 생겨나면서도
가장 크게 의심하였던 것이 불교에서의 이 멍에였는데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그 원죄(原罪)보다 수백 배,
아니 수천 배도 더 무거운 것들이 중생에게
지워져 있는 것 같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한스럽고
참으로 절망스러웠던 시간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살펴보건대,
하루도 쉼 없이 ‘해라 마라’ 온갖 잔소리를 해대며
애탕지탕 씨름하며 키워야 하는 자식들이 있는 죄로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며
살을 섞고 애욕(愛慾)으로 살아가는 처나 남편이 있는 죄로

갈수록 각박하고 이기적이 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혼자만 당할 수 없어 악착같이 속고 속이거나
또는 누군가의 주구(走狗)가 되더라도
필요한 돈은 벌어야 하는 죄로

아! 생각하면,
어쩌면 뒤죽박죽 힘자랑을 해대는 탐진치(貪瞋痴)가 아니면
존재할 수 도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에서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 있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만큼의 온갖 이유들이 자의든 타의든
서로 얽히고 설 켜서 서로의 목줄을 매고 있음이니.......

어쩌면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에 엉켜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존재가 중생일 것이고
나도 그 중생일 수밖에 없이 살아온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으며

체계적인 불교의 공부에도,
정녕 한 조각만이라도 얻고 싶은 깨달음도,
그래서 더욱 가고 싶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삼매(三昧)도,
아니, 팔만사천이라는 부처님의 설법들 중 한 설법도,
위대하고 훌륭하시다는 제대조사 내지 천하종사가
전하는 전법(傳法)의 한 말씀들도,

하다못해 이 시대의 뛰어난 선지식이나 큰 스님들이
가르쳐 주고 있다는 한 법어(法語)들조차도
시간과 돈이 필요함에 이르러서는
어찌 너무 너무 낯설지 아니 하고 어찌 저만치 멀게 느껴지지 않았겠는가?

정녕 중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 일까?

애탕지탕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이 세속에서
도대체가 탐진치(貪瞋痴)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매일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는 군상들의 삶으로서야  
불교의 이 멍에는 죽어서도 비켜갈 수 없음이니

언감생심 깨달음은커녕, 어찌 극락정토의 언저리에라도
갈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중생 구제이니 중생 제도이니 하는 말에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 그래도 참으로 먹고 살아야 할 현실의 삶은
처절하기만 하고, 인과(因果)로 엮여진 사람들과 세월은
잠시라도 홀로 내버려두질 않는데.......

어느 듯, 눈가와 이마와 이놈의 몸뚱이 곳곳에
늘어가고 깊어가는 것이 달갑지 않는 주름이요,
반갑지 않은 병들만 찾아듦이라

이들 앞에 갈 길 먼 마음은 어찌 할 바를 몰라  
더욱 무겁고 조급하기만 하고
속절없는 세월은 긴 한 숨만 절로 나게 하고
생각하자니 하릴없이 절로 눈시울만 적셔지는구나.......

그나저나 승과 승가들은 도대체 무얼 믿고 있기에
무조건 다 버리고 무조건 다 비워서
견성(見性)하라고만 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부처를 이룬다 하는데,

도대체 그리 하기만 하면
억겁의 세월동안 이렇듯 얽히고 설 켜서 지고 간다는
중생의 모든 문제들도 절로 함께 풀려지고 좋아진다는 것인지

아니면, 뭘 어찌 다 처리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문제가 스스로 모두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것인지.......

아님 달리 뭐가 어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런 저런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견성성불(見性成佛)만 하면 되나보다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편, 일체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견성하고 성불한다는 논지들이 천하를 메우고 있음이니

만약 일체의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워서
그래서 구애됨이 없이 해탈하여
적멸위락((寂滅爲樂)의 열반에 든다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어떤 의미로서든 다시 집착을 들게 됨으로서
그 열반의 즐거움도 깨어지고 해탈도 버리게 되면서  
결국 부처를 버리는 것이 되고 마는 결과가 되는 것이
불자라면 모두가 추측할 수 있는 인과(因果)의 법이거늘,

과연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 어떻게?
이렇듯 탐진치(貪瞋痴) 삼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수많은 업보와 사연(事緣)으로 얽히고 설킨
그야말로 업보(業報) 덩어리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어찌 견성(見性)하여 성불(成佛)하자마자
이를 깨뜨리고, 도로 중생의 멍에를 쓸 것이라는 모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으면서
그토록 부처를 팔고 중생을 팔아 이야기하는 것인지?

너무나 화려하고 다정다감하며 그럴듯한
법문들과 설법들이 이 세상을 가득 메울 듯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네 범부 중생에게는
도무지 속 빈 강정이요, 공염불이고 위선(僞善)이며,
아무리 읽고 열심히 들어도 그 때뿐, 남겨지는 것이 별로 없고

다만 그저 또 다른 법문과 설법들에게
그 자리들만 서로 교체될 뿐이라면, 결국
그 모두 응당 버려져야 할 한 낱 쓰레기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쯤 되고 보면 분별심과 중생심과 아상(我相)이 일어나
부처의 법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아예 접어두고
오히려 다만 배척하고자 하는 일 외에는
달리 어찌 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든 저렇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멋지고 훌륭해 보이는 법문과 설법들이  
중생의 더러운 탐진치를 괴로워하고 번뇌하며 인내하고
온갖 고통으로 사랑해서 피워진 연화(蓮花)는 결코 아니어서
결국 그들 자신의 것도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건 그들 수행자들의 것이어서 그러려니 하면서도  
도대체가 우리네 범부 중생들 마음에 들이닥치듯 들어와서  
크게 참회하고 깨우칠 수 있는 정답 하나 주지도 못하면서

그저 한자(漢字)로 만들어진 글들을 가슴에 숨기고 있으면서
애꿎은 마음 타령만을 하고 있으니 애달프기만 하다.

그나저나, 도대체 나는, 나의 어디에
부처님과 같은 불성이 있기에 그토록 보지 못한단 말인가?

정녕, 삼악도의 윤회를 살피는 삼매(三昧)이든
정녕,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는 삼매이든
정녕, 해탈과 열반에 드는 지혜의 희열을 느끼는 삼매이든  

도대체가 그런 비슷한 데라도 들어가 볼 수 있기나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그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불성(佛性)을 볼 수 있고
또 진리(眞理)를 보고 알 수 있으며,
또한 변함없는 진리가 품고 있는 법성(法性)도 가지고 있으므로
삼라만상 그 어떤 것에도 구속(拘束)되거나
구애(拘&#31001;)되는 일 없이 해탈(解脫)할 수 있으며

결국 우리들이 보고 알고 있는 모든 진리들을
자유스럽게 오가는 보리심을 이루어 잃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궁극에 이르러서는
자유롭고 조용하며 안정한 열반을 이루게 될 것이다.

과연 어찌하면 되는가?

본래 비법(秘法)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대개 비법(秘法)이란 것은
사실 너무나도 우리 가까이에 있어서,

마치 바로 우리의 몸인 우리의 눈에 붙어있으면서도
잘 발견할 필요도 없고

또 존재의 이유를 잘 알 필요도 없는 속눈썹 같아서
아무리 밖으로 또 밖으로 찾고 구해 다녀도
발견하지 못하고, 잘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며,

수많은 비법들이란 것들이 대개
그렇게, 또 그런 자리에 존재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를 전제로 하여 견성(見性)하는
비법(秘法) 아닌 비법(秘法)을 말하게 되겠지만,  
우선, 현재의 모든 정황과 사정 내지 현상(現狀)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살펴 인식할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훌륭한 의사는 아무런 편견과 사심을 가지는 일 없이
무엇보다 환자와 그 병세를 먼저 자세히 살펴서
진단하고 처방하듯이.......

먼저 견성(見性)이란 것이 무엇 하는 것인지부터 잠깐 보자면,

견성(見性)이란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라 했고
그래서 자신의 성품을 보는 방법과 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니

‘마음을 항상 담아두고 살펴보도록’ 하기 위해
그럴 듯한 ‘말머리’라고 하는 글귀를
화두(話頭)라는 이름으로 짊어지게 하고,
이 화두를 터 잡아 마음에서 늘 떠나지 않도록
경계하며 붙잡게 한다는 것이 그 방법이고

또 달리, 알고 있는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으로
생활 주변이나 자기(自己) 스스로에게서나 오직  
그 말머리를 써 먹을 만한 곳이나 방법을
찾아내려는 행위나 생각을 일컬어서
지혜(知慧)를 구한다 하는 것이지만,
이 방법과 지혜를 구한다는 것이 별개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지혜를 구하는 방편이
선정에 들어 삼매(三昧)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어서
뭔 이야기인지 어렵기만 하다.

이러한 삼매(三昧)에 드는 것에 대하여
뭇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들을 많이도 설하여서,

여기저기 이런 저런 방법들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삼매(三昧)의 방법이 더러 있으나
모두 승(僧)과 승가(僧家)들을 위한 것이어서

버리고 비워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채우고 얻어야 할 것이
오히려 더 적고 쉬울 수 있는 중생들 입장에서 보면

모두 알기 힘든 헛된 소리요,
별 쓸모없는 삿된 방편들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도저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또 사실 온전하게 모든 것을 비워낸다는 것이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사바세계의 중생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데다가
그렇다고 승과 승가들 마냥 독야청청 할 수도 없고

또 달리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남편과 처와 자식을 두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마냥 피할 수도 또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
범부 중생의 숙명이기도 하거니와    

사실, 이런 저런 모습의 가면을 빌어다 쓰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어떤 모습들을 흉내 내어 봤자
그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별로 신통하지도 또 그렇다고 방통(旁通)하지도 않아서
그 끝을 보기 어렵고, 단지 애꿎은 한 숨만
남몰래 쉬어 댈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흉내를 내고 마는 삼매(三昧)의 맛보기일지라도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나마 잠시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고
그런 공부를 경험하기 위한 짬이라도 있는 사람들의
부럽고 행복한 이야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 불법승의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공부도 좀 하고,
현실에서도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면서
그냥 우리의 방식과 우리의 형편대로 불법(佛法)을 공부하는
주인(主人)이 되어 견성도 하고 나아가 성불까지 하면 더 좋고,
하여튼 그러면서 세속에서 온 가족과 이웃들이
서로 어울려 가며
살아가는 불가(佛家)를 정말 이룰 수 없는 것일까?  

하여튼, 견성이든 성불이든 삼매이든 지혜이든
그 구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법(法)이 무엇이든 간에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이니
응당 어찌 사람인가를 먼저 살펴보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버리고 비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그 시작을 하여야 하는 것이
유사 이래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背馳)되고
상반(相反)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들어보고 판단하고 또 잠시라도 행해보아서, 만약 삿되고
부처님의 법이 아니다 싶으면 그저 갖다 버리면 되는 일이리라.

명상을 하려거든 명상을 하고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화를 내고 싶으면 화를 내어라.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대로.......

욕을 하고 싶거든 아낌없이 퍼붓고
고함을 지르고 싶거든 있는 힘을 다 해 쏟아내어라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대로.......

사랑하고 싶거든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싶거든 마음껏 미워하라.
음욕이 오르면 사랑하는 이와 미친 듯이
살을 섞어 절정에서 환희도 맛보아라.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울고 싶으면 울고 슬프고 마음 아프면
영혼이 흐느끼도록 슬퍼하고 괴로워 하거라.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현재로서의 삶을
너무 비굴하게 생각하거나
진실로 비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비록 범부 중생이라 하나 탐진치의 삼독(三毒)에 빠져
고통스럽게 윤회를 거듭할 죄업만을 짓는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니라고
강변(强辯)하고 또 강변하고 싶다.

부디, 스스로 공동묘지에를 찾아갈 생각으로
거기에 누워 자신의 패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박심과 차책감으로 자신을 파멸시키지 말라.

비록 평범함 속에서 있을지는 모르나
파멸을 향하여 달리는 무리의 하나는 결코 아니다.

70억 이상의 인간이 세상을 살아 왔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역사가 다하는 날이 오더라도
똑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독특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이 우주 전체에서 제일 진귀한 존재임을 모르고 있었다면
이제라도 알면 좋겠다.

사랑이 절정에 다다랐던 순간에
아버지로부터 사랑의 씨앗이 4억 개 이상이나 흘러나와,
그들 모두 어머니 몸속에서 반쪽을 찾아 헤엄쳐 갔지만,
오직 하나 하나를 제외하고 도중에서 포기하고 죽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대이며 나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하나의 도토리 껍질을 채우는데
무려 2백만 개 이상의, 또 하나의 반쪽들인 난자들이 필요하였을 것인데,
오직 혼자, 그 작은 세포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거의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어둡고 험난한 넓은 해양 속에서 참고 견디었으며,
드디어 반쪽과 반쪽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
결국 우리 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개의 세포는 기적적인 결합을 하였고
24개의 염색체를 가졌으며
각각의 염색체 속에는 수백만 개의 유전자 정보와 인자가 있어서

사람의 성질과 눈의 빛깔, 태도, 매력, 두뇌의 크기 등
하늘의 별만큼이나 가득하지만
분명하게 서로 다른 것들이 결정되었으며,

정신과 언어, 행동과 외모, 동작의 특성들만으로도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히 값을 헤아릴 수도 없는 보물로 존재하는 이들이
바로 그대이며 나가 아니던가?

생명을 지탱할 수 있도록 심장을 주었으며
조금도 쉬지 않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매년 3천 6백만 번이나 고동치며,

10만 킬로미터나 되는 동맥과 정맥의 혈관들은
지구를 3번이나 돌아 올만큼이나 되는 것이며
그 혈관들을 통해 매년 227,000리터(약 10,000드럼 이상)가 넘는 혈액을
너의 몸 속 구석구석으로 흘려보낸다.

1억 개가 넘는 감각 세포로 이루어진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있고, 대자연의 신비와 온갖 꽃,
새와 무지개, 안개꽃과 장미, 어린아이, 구름, 별과 달...
천하 만물을 다 볼 수 있으며

2만 4천개의 조직으로 만들어진 귀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 파도소리, 나무에 부딪히는 바람소리 ..... 등등
온갖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나누는 언어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노여움을 안정시키고, 풀 죽은 사람을 고무하고,
절망하며 포기한 자를 희망과 위로의 말로 일으켜 세울 수 있고
무식한 자를 일깨울 수 있으며.....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희유하며 얼마나 귀하며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 지를 위와 같이 말한다면
이 자리에서 한 권의 책을 지어내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본말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쯤에서 각설할 것이나  
위와 같은 정도의 논지만으로도, 승속을 떠나,
우리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존재임을 역설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그러므로 감히 말하건대,
부디 그냥 생각 생각으로 거울 하나 만들어 놓고

그 거울로, 하는 생각마다 하는 행동마다,
부디 그때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비추어 주는
마음속의 거울을 하나 그려 두고,
그 거울 속에 비춰지는 자신을 쳐다 볼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 거울을 통해서 정지된 TV나 비디오를 보듯이  
온갖 짓거리를 다하고 있는 그대를
아주 잠깐씩만, 이런 저런 행동과 말을 하며 생각하고 있는
거울 속의 그 사람을 들여다보고, 마음속으로,  
그러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또 뭐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습관을
가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이제라도 시작해보는 것을 부디 늦추지 마시면 좋겠다.

이를 게을리 하지 않고 애를 써다 보면
현실의 상황이 변할 때마다 행동의 변화하는 과정들에서도
마음을 따라 언제든지 물어 볼 수 있게 되나니

삼라만상을 어느 쪽으로든지 치우침이 없이 보게 되는
소위 어려운 말로 평등성지(平等性智)의 안목을 갖게 되고,

나중에는 그 거울에 다른 사람들도 비출 수 있게 되는데
서로 같은 것도 서로 다른 것도 보게 될 것이고
묻는 것이 달라지고 대답도 달라질 것이라
소위 어려운 말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형성된 것이며

묻고 답함이 자연스러워 질 쯤이 되면
온갖 사량(思量)과 계교(計巧)들을 만들어 가면서
온갖 것을 만들어 내던 도구였던 소위 분별식(分別識)이란 놈은

묘하게도 모든 것을 꿰뚫어 관찰해내는
소위 어려운 말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새롭게 형성되어 변해있음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삼라만상의 온갖 경계를 반영하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누구든지 필요한 사람이나 필요한 경우에
그 필요한 일을 해줄 수 있는 소위 어려운 말로 소작지(所作智)가
절로 생겨나 있음을 알게 될 것이어서

이런 지혜가 생겨나게 되면
지나간 과거의 지식(智識)과 상식(常識), 그리고 습성(習性)에 의해
살던 삶이 지혜로운 삶으로 바뀌게 되나니
몸은 같은 몸을 갖고 살아도 생각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범부가 성인이 되는 견성(見性)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매일 사바세계에서 탐진치로 씨름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훨씬 빨리 견성하게 될 것은 당연할 것이리라.

  나무 시아본사 비로자나불!
  나무 시아본사 비로자나불!
  나무 시아본사 비로자나불! _()_  

- 2013.  6.  18.   도솔 배상.
wndtodrnwp [2013-06-19] : 육과 영을 분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鏡潭 [2013-06-20] : 중생구제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오랜만입니다. 바쁘셨는지요? 자주 오셔서 좋은 말씀과 고견이 있으시다면 이 곳 모든 법우님들께서 물론 소생도 공부할 수 있도록 글로 올려주시기도 하였으면 하고 바랍니다. ^^
법성화 [2013-06-25] : 도솔거사님안녕하세요? 긴 글이지만 조용히 마음을모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참으로 박학다식하신것 같아서 얄팍한 지식으로 불교를 안다고 어디가서 불자다. 라고 말한자신이 모순되지는않나 싶지만,저 밤하늘의 달을가르키는 막대기가있다면 그 가르키는 달을봐야지 그막
법성화 [2013-06-25] : 대기를 가지고 이런저런 논리를 펴봐야 달을 볼수가 없습니다, 저의 얄팍한 불교상식으로 어디가서 불자라고 당당히 말하는 제자신이 저는 부끄럽지않습니다.비록 깊은 공부는 하지않아 서툴고 모르지만 불교의 정의는 깨달음이요 실천이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잘사는것보다
법성화 [2013-06-25] : 사람답게 사는 잘 살아가는것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참회를합니다,전생의 업과 현생의 업을 소멸하고자 부처님께 기도도 합니다,확실한것은 자기를 깨닫고 참회하며 뚝심으로 밀고 나가는것 그 정신이 우리의 진정한 뿌리가 아니겠는지요? 많은 공부는 하지않았고
법성화 [2013-06-25] : 어려운 경전과 교리는 잘몰라도 나 답게 사는것, 남을 배려하는마음, 그리고 항상 참회하는 마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공부가 깊으신 도솔님덕분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백사람이면 백사람의 생각이 다 다르듯이 어느것이 맞
법성화 [2013-06-25] : 다는 정답은 없는것 같습니다, 나쁜짓하지않고 참회하고 기도 열심히 하는생활 그럼으로서 자신이 행복하다고믿으면 그게바로 성불이요 깨달음이겠지요. 비내리는밤 조용히 거사님의 좋으신 글을읽어보면서 잠시 제 생각을 피력해보았습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음에 기쁘고 제
법성화 [2013-06-25] : 마음을 담을수 있기에 기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삶이 되기를 소망하오며 깊은밤 귀한 공부가 되었습니다, 늘 깨어있는 삼ㄹ 되시옵소서 ()
법성화 [2013-06-26] : 삶.
鏡潭 [2013-06-30] : 깊은 관심과 좋은 말씀의 긴 댓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법성화님! 과찬의 말씀에 송구하옵고 법성화님 처럼 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견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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