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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가귀감 본문 제74장 [분별은 불행의 지름길이다]
法空 2015-01-25 23:53:04, 조회 : 1,463, 추천 : 0
凡人(범인)이 臨命終始(임명종시)에 若一毫毛(약일호모)라도
凡聖情量(범성정량)이 不盡(부진)하고 思慮(사려)를
未忘(미망)하면 向驢胎馬復裡(향여태마복리)하야
托質(탁질)하며 泥犁확湯中(이리확탕중)에 煮잡(자잡)하며
乃至依前再爲누蟻문맹(내지의전재위누의문맹)이니라.

《한자》毫(터럭 호)
        情量(정량: 思量사량분별)
        驢(나귀 려,여)
        托(맡길 탁)
        質(저당 질. 바탕, 질박할)
        泥犁(이리 : 지옥)
        확(가마솥 확)
        煮(삶을, 구울 자)
        잡(삶을, 튀길 잡)
        누蟻문맹(누의문맹: 땅강아지, 개미, 모기, 등에
                 : 보잘것없고, 소인배나 쓸모 없는 것을
                   비유)

사람이 임종할 때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나귀나 말의 뱃속(태)에
끌려들거나,지옥의 끊는 가마 속에 처박히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예전(전생)처럼 다시 개미나 모기 같은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 漢文本 註解 (⊙ 언문 주해와 동일)

白雲(백운)이 云(운) 設使一毫毛(설사일호모)의
凡聖情念(범성정념)이 淨(정)이라도
亦未免入驢胎馬腹中(역미면입여태마복중)하며
二見(이견)이 星飛(성비)하면 散入諸聚(산입제취)라.

'백운선사'가 이르기를 "가령 범부라거니 성인이라거니 하는
생각이 깨끗이 없어져서 털끝만큼이라도 남은 바가 없다 하더라도,
또한 나귀나 말의 뱃속에 들어가는 것을 면치 못하리라"하였다.
두 소견(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경계)이 번뜩이면 여러 길에
들어가게 된다.

제취(諸聚) : 중생윤회의 육도(六道 :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및  정신상의 온갖 분별을
             뜻한다. 취(聚: 무리, 모일 취)를 길(道)로
             해석한다.

◈ 頌

烈火茫茫(열화망망)하고 寶劒(보검)이 當門(당문)이로다.

《한자》茫茫(망망: 성한 모양. 아득한 모양)
        當門(당문: 당면. 바로 눈앞)

모진 불(업화業火)이 펄펄 붙고  보배 칼이 눈앞에 번쩍인다.  

⊙ 漢文本 評


評曰(평왈) 此二節(차이절)은 特開宗師(특개종사)에
無心合道門(무심합도문)하여 權遮敎中(권차교중)의
念佛求生門(염불구생문)이나 然(연)이나 根器(근기)가
不同(부동)하고 志願(지원)이 亦異(역이)하니
各各如是(각각여시)라
兩不相妨(양불상방)이니願諸道者(원제도자)는
平常隨分(평상수분)하여 各自努力(각자노력)하여
最後刹那(취후찰나)에 莫生疑悔(막생의회)하라.


《한자》遮(가릴 차. 이 저)
        隨(따를 수)
        莫(하지 말 막)

이상의 두 구절은 특별히 종사가 無心하여 道에 合하는 문을
열고,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나기를 원하는 문은 한 때 권도
(權道: 방편)로 막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바탕과 그릇이 같지 않고,
뜻과 원이 또한 다르므로 이와 같은 두 가지가 서로 방해롭지
않은 것이다.

바라건대 공부하는 이들은 평소에 분수대로 각기 노력하여
마지막 찰나(임종하는 순간)에 의심하거나 뉘우치지 말라.


('붓다 뉴스'에 연재된 '원순스님'의 '선가귀감 강의' 중 발췌)

부처님께서는 범부의 알음알이를 없애 주려는 방편으로
먼저 성인의 깨달음을 내세우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범부와 성인, 이 두 가지 모두는 중생의
분별심일 뿐 '그 실체는 공(空)이어서 본디 결정되어 있는
성품은 없다'라는 중도 법문을 설하셨다.

중생의 견해가 범부나 성인이라는 고정된 관념으로 변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지은 업의 그림자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여 범부의 알음알이는 버리고
성인의 깨달음만을 취하려고 한다면 불을 피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다.

'범부의 알음알이'와 '성인의 깨달음'이란 마음으로 분별하여
만든 마주보는 개념으로서 모두 변견(邊見)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변견이란 시비 분별로써 한쪽에 치우쳐 자기주장만 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이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려면 범부의 알음알이에서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을 보고,
마찬가지로 성인의 깨달음도 공성(空性)임을 깨달아,
범부와 성인 양쪽에 대한 집착을 다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모든 집착을 벗어나는 무심중도(無心中道)이다.

이렇게 모든 집착을 벗어나 무심할 수 있다면
저절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게 된다.
이런 경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직 범부의 알음알이가 남아
있어 성인의 깨달음에 집착하게 된다.
결국 경계를 따라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
이 잘못으로 육도에 윤회하다 지옥이나 축생의 몸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소견이라 함은 마음속에 주객(主客)이 남아 있는 생각을
말한다.
생각하는 주체인 주(主)와 대상으로서 객(客)인 생각을 내세우는 분별심을 아직 끊지 못한 것이다.
한 티끌 남아 있는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생각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할지라도,
깨끗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남아 있으면 주객으로 나누어진
두 소견이 번뜩이는 것이다.
이는 아직 미세하고도 미세한 내 생각이 아직 남아 있어 업의
뿌리인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육도에 윤회할 수밖에
없다.
  
중생이 윤회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 업연(業緣)이 커져 뒷날
얼마든지 나귀나 말의 뱃속으로 들어가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

세찬 불이 활활 인다는 것은 번뇌가 끝없이 일어난다는 뜻이고,
이 번뇌들을 단숨에 끊어 없애자면 공성(空性)임을 아는 보배
칼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가 아니면 안 된다.
그 보배 칼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는 모든 시비와 분별을 떠나
있는 무심을 말하고,
이 무심이 바로 도에 계합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깨친 사람은 모든 시비와 분별이
사라졌으므로 헛된 생각이 없어 무심하다.

서산 스님의 풀이는 무심한 경계만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중생의 근기에 맞게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중생은 바탕이 다르고 뜻과 원력이 제각기 달라도 저마다
옳은 점이 있으므로
이것만 이해한다면 공부에 조금도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연에 따라 염불하여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숨이
끊어질 찰나에도 오직 일념으로 염불을 해야 한다.
숨이 끊어질 마지막 찰나에 참선하던 사람이 참선을 의심하고
염불을 한다거나, 염불하던 사람이 염불을 의심하고 참선
못한 것을 뉘우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공부이든 한번 믿고 시작했다면 결실을 맺을 때까지
밀어 붙어야 효험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공부이든 바르게 한번 믿었다면 분별심을 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결실을 얻는 공부,
이것이야말로 무심 도리라고 할 만한 것이다.

[출처] § 선가귀감 § 본문 제74장
운암(雲庵) [2015-01-26] : 법공거사님 고맙습니다._()_
보명화 [2015-01-26] :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대덕심 [2015-01-28] :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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