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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금강경 金剛經 구경무아분
常不輕菩薩 2015-07-04 23:53:38, 조회 : 1,245, 추천 : 0
그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선남자나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는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길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중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낼지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멸도에 이르도록 제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멸도에 이르도록 다 제도하였으나 한 중생도 참으로 멸도에 이르도록 제도된 사람은 앖다 라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수보리야 실지로는 어떤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 회상에서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것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아는 허망한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께서 이르시길 모든 법은 모두 다 불법이다 라고 하시느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이란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니므로 이름을 일체법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사람의 몸이 대단히 크다는 것과도 같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대단히 크다는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일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이르도록 제도했노라 한다면 곧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참으로 어떤법도 없는 것을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수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일체법은 나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도 없고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오래산다는 것도 없다 라고 하셨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했노라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불국토를 장엄한다 함은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와 법 없음을막힘없이 환히 통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길 이름하여 참으로 보살이라 할 것이니라...
-----------------------------------------마침내 나도 없음.

  해설

구경무아분에서는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십육 분까지의 가르침이 다시 정리되어 설해지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총정리 대목이기도 하고 금강경 후반부로 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는 내용입니다.
구경무아란 궁극에는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마음 가운데 모든 상을 소멸시킨 적멸의 경계이고
부처님 경계입니다.'나'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나'라는 상에 머물러서도 안 되며 '나'라는 껍데기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모든 상을 버리고 실체와 하나 되는 수행을 통하여 무아의 경계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과 하나가 되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아의 깨달음을 완성한 존재를 진정한 보살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서도 내가 했다는 상을 갖지 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법을 얻었다는 상을 내지 않습니다. 불국토를 장엄했다 하더라도 내가 장엄했다는 상이 없어야 진정한 보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마음을 내었을 때에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수보리가 질문하고 부처님께서 답하고 계십니다.
무아의 가르침이 너무나 중요하고 증득하기 어려운 가르침이기에 다시 한번 요약되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일체중생을 지혜의 길,성불의 길로 이끌겠다고 원력을 세우고
그들을 다 제도한 후에도 실로 한 중생도 내가 제도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일체중생을 다 제도해 마치고서도 한 중생도 멸도한 바가 없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제도하는 나도 없고 제도 받는 중생도 없고 제도할 법도 없는 완전한 無의 경계가 진정한 보살의 경계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무아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 자리이며 성불의 자리입니다.

나' 라는 상이 있는 사람은 소리를 내지만 마음을 비운 사람은 무한한 허공이 영원한 침묵을 지키듯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일을 하며 소리를 많이 내는 사람은 그 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며 마음을 비운 사람이 아닙니다.
합당한 자리에 놓여 있는 물건은 소리가 없는 법입니다.발에 꼭 맞는 신발은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도 모를 만큼 편안합니다.
신발이 맞지 않아 불편할 때 이런저런 불평이 생겨 시끄러워지는 법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잘 맞는 신발처럼 주어진 환경에 묵묵히 아무 소리 없이 자신을 맞추어 나갑니다.
마침내는 환경을 극복하고 환경을 지배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으니 마음을 항복받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항복받는 길은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물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한순간도 쉬지않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마음이 다른 데로 흩어질 기회가 적어집니다.
염불하면 염불하는 만큼  관세음보살께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도 마음을 항복받기 위해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낸 제도적인 장치인 셈입니다.

꾸준히 기도정진하고 부처님 말씀을 듣다보면 마음 가운데에 상이 스러져 나가면서 점점 집중력이 강해집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으니 관세음보살님의 사랑이 감지되지 않을 뿐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한 자비심을 느끼려면 마음의 레이더의 녹을 벗겨 내고 주파수를 맞추어야 됩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관세음보살님과 일체가 되려는 노력을 하면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가호지묘력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유법이라는 경계는 눈에 두드러지고 나를 내세우는 마음이 없는 마음의 경계, 무유(無有)의 세계를 얘기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허상이고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연등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으신 것입니다.

만약에 껍데기나 형체가 있는 물질의 세계를 바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연등불이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기는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이심전심의 묘리로 받는 것이지 무슨 증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나 깨달음은 전해 받고 전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 속에 본래 깃들어 있는 것을 밝혀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비쳐지는 세계에만 취해서 살다 보니 본래의 마음자리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순간순간 변하는,눈에 보이는 세계를 담보로 해서는 영원성을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일체만상이 부처요 진리라는 뜻입니다.
여'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다 ,항상 바르다는 의미로 불생불멸하는 깨달음의 실체요,법신을 말합니다.
만상을 대할 때 항상하고 영원한 의미를 담고 살아가는 사람은 여래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무한한 세계와 장구한 미래를 내다보며 말하고 행동하므로 바깥 경계에 따라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영원성을 담보하고 살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음 가운데 포용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세간의 가르침이기에 부처님의 말씀을 벗삼고 진리의 세계를 호흡하며 살아가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욕망의 세계는 싸워야 되고 쟁투해야 되기에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떠난 자리에서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우리가 세속을 살아가면서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살아가는
마음만 낸다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우주를 다 소유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유법의 경계, 마음의 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얻은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는 모든 물질경계는 우리의 분별심으로 지어진 거짓 모습이므로 실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별을 여읜 부처의 경계에서는 일체만상이 진실하고 진리 그 자체이므로 헛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얻어지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때가 오기 때문에 무실무허라고 한 것입니다.

일체만상은 마음의 세계를 바탕으로 생긴 것이므로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투입해서 만상을 대하는 것이 일체법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만상이 다 진리를 드러내는 모습이기에 일체법이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교훈이 될 만한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되기에 일체법도 일체법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일체법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을 몸이 큰 사람에 비유하십니다.
눈으로 보이는 몸이 크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몸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대적 분별과 인연에 따라 크고 작음이 있을 뿐 무법의 경계에서는 크다 작다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허공을 크다 작다 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다 제도했다는 것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살은 그런 큰 복을 짓고도 자기가 지었다는 생각조차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인,중생,수자의 팔만사천 가지 일체 모든 상이 다 떨어진 자리가 바로 보살의 경계입니다.
복을 짓는 내가 없고 그 복을 받을 내가 없는데 어떠한 법이 있어 보살이라 하겠습니까?

중생을 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드는 것도 '나'가 없음의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도 궁극의 경계에서 보면 장엄이라 할 것이 없으니 다만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면 누가 누구를 제도할 것이며
세상이 본래 청정한 곳이라면 무엇으로 세상을 장엄한다 하겠습니까?

내가 누군데 하는 우월심도 나와 남을 가르는 차별심도 버리고,
중생과 부처를 갈라놓는 나약한 마음도, 한 세상 살면 그만이라는 못난 마음도 떠나
일체상을 여읜 경지가 구경무아의 경지인 것입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는 법 즉 무아법에 통달한 사람을 진정한 보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상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 비로소 중생과 세계의 참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조항조 / 사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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